세상읽기…그것은 보수가 아니다

그것은 보수가 아니다홍덕률대구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문재인 정권은 일본 정부에게 사과하라!’ 일본의 극우 사이트에서 따온 말이 아니다. 서울의 엄마부대 대표 말이다. 그것도 일본대사관 인근 소녀상 옆에서 시위하면서였다. 그는 또 이렇게 덧붙였다. ‘아베 수상님, (한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진심으로 사죄드린다.’ 과연 한국인의 말인지 귀를 의심하게 된다.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서 일본과 함께 전쟁의 전범이다.’ 일본 관변 역사학자의 주장이 아니다. 한국의 한 목사가 설교 중에 한 말이다. ‘(문재인 정부는) 한일갈등을 아베가 만들었다고 뒤집어 씌우고 있다.’ 전광훈 목사의 말이다. 일부 보수 언론과 지식인과 기업인도 가세했다. 국제사회에서는 물론이고 일본 내에서도 아베정권의 국제규범 위반과 무례에 대한 비판이 커지고 있는 마당에 정작 한국에서는 아베를 두둔하는 목소리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이들의 논리를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일본은 강하다.’ ‘한국은 일본 덕분에 성장할 수 있었다.’ ‘일본은 한국에게 은인이다.’ ‘최근 한일 갈등의 책임은 현 한국정부와 문재인 대통령에게 있다.’ ‘지금이라도 대통령이 잘못했다고 일본에 숙이고 들어가야 한다.’ 거기서 한발 더 나간 이들은 ‘일본에 잘못 대응하고 있는 현 정권을 타도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한다. 문제는 보수 정당들의 주장과 논리도 다르지 않다는데 있다. 앞에서 인용한 엄마부대 대표도 자유한국당의 디지털위원장을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것은 보수가 아니다. 그들에게서는 보수의 중요한 가치와 논리와 품격이 보이지 않는다. 두 가지만 짚어본다. 첫째는 ‘애국’의 실종이다. ‘애국’은 보수의 중요한 가치 중 하나다. 특히 외침 앞에 위태로워진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목숨마저도 초개처럼 버릴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 것이 보수다. 그런데 위의 인사들은 한국의 주권과 자존심보다 아베의 심기를 더 중하게 떠받든다. 사실상 전쟁 상태임에도 역사 인식과 주장이 일본의 아베정권과 거의 같다. 그것은 보수의 자세일 수 없다. 가짜 보수일 뿐이다. 돌아보면 그런 주장과 행동은 과거 일제 때도 있었고 나치에 짓밟혔던 프랑스 등 유럽 여러 나라들에서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나라에서도 그런 이들을 보수주의자라고 칭하지 않는다. 그냥 친일이고 나치 부역이며 매국일 뿐인 것이다.다른 하나는 자유무역 원리에 대한 입장이다. 오늘날 보수주의라면 자유시장주의를 핵심 가치 중 하나로 추구한다. 국내에서 자유시장 정책을 지지하는 것처럼 국제 사회에서는 자유무역주의를 신봉한다. 그것은 세계적인 현상이다. 정치적 이유로 자유무역 원리를 차버린 아베를 비판하고 있는 세계 주요국의 정치인과 언론과 지식인들은 대개 보수주의자들이다. 일본 내에서 아베가 잘못했다고 시위하는 이들이야말로 양심적인 보수주의자들이다. 그러나 한국의 보수 정치인과 언론인, 지식인들은 그렇지 않다. 당혹스러운 일이다. 자유한국당이 진정한 보수정당인가 질문받게 되는 이유, 보수 성향의 시민들까지 자유한국당에 등을 돌리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보수 정치인들과 보수 인사들이 과거 두 보수 정권의 실패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했다는데 있다. 보수가 지켜야 하는 가치는 무엇인지, 한국의 보수는 왜 실패했는지, 어떻게 다시 태어나야 하는지, 뼈를 깎는 성찰이 있어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지지해 준 보수 유권자들을 포함해 국민 앞에 진정으로 참회해야 했으나 그것도 없었다. 역사 앞에 책임지는 이가 있어야 했지만 그렇지도 못했다. 교훈을 얻는 대신 증오심과 권력욕만 키워 왔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사건건 정부를 비판하는 데만 올인한다. 심지어 가짜뉴스와도 손잡는다. 권력을 잡는데 도움된다면 못할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 애국과 논리와 품격은 잃어버린 채 권력투쟁에만 빠져 있다. 그리고 그것을 정치라고 착각한다. 일본의 극우세력과 같은 주장을 하는 데까지 나아간 것은 그 결과일 뿐이다. 오는 15일은 74주년 광복절이다. 어느 해보다 뜻깊은 광복절이 될 것이다. 바람이 하나 있다면 한국의 보수가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지금 무엇이 잘못되어 가고 있는지 잠시 멈춰 서서 성찰해야 한다. 그래서 주권국가의 자존심과 자유무역질서를 수호하는 참 보수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보수가 국민의 지지와 신뢰를 받아낼 수 있는 길이다.

한 권으로 읽는 자치통감

한 권으로 읽는 자치통감사마광, 푸챵 지음/나진희 옮김/현대지성/496쪽1만9천800원자치통감은 세종대왕이 필독서로 삼고 시진핑이 지도층에게 일독을 강조한 중국 최고의 역사서다. 나라의 정치가이자 역사학자였던 사마광이 19년에 걸쳐 전국시대부터 송나라 건국 직전까지 1천362년간의 역사를 294권으로 기록한 것이다. 자치통감은 세상에 나온 이래 역대 황제와 리더들의 길잡이가 됐다. 세종대왕, 마오쩌둥, 시진핑은 물론이고 불확실한 현실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수많은 이들이 자치통감을 펼쳐들었다.이 책은 58편의 이야기로 자치통감의 핵심을 소개한다. 여러 곳에서 중복돼 접할 수 있는 이야기들은 최대한 제외하면서 역사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 자치통감에서 가려 뽑은 이야기들은 우리의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예를 들어, 후계자 하나를 잘못 세워 가문 전체가 고꾸라진 지선자의 이야기에서는 한창 사회면을 달구는 특혜 논란을 떠올릴 수 있고, 서진의 멸망에 대해 기록한 대목인 ‘관리를 뽑는 제도는 유명무실했고 황제의 친척 자제들이 파격적으로 임명됐다. 신하들은 전부 갖은 수단을 다해 명예를 추구했고 나라를 위한 생각은 전혀 없었다.’에서 우리 사회가 가지 말아야 할 길을 읽어낼 수 있다. 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

세상읽기…여전한 ‘극단의 시대’

여전한 ‘극단의 시대’홍덕률대구대 사회학과 교수‘극단의 시대’.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20세기를 그렇게 불렀다. 파시즘, 유대인 대학살, 볼셰비키 혁명과 중국 문화혁명, 제국주의와 민족해방전쟁, 종교전쟁, 1, 2차 세계대전, 냉전과 매카시즘으로 점철된 20세기였으니 그렇게 부를 만하다. 이념, 종교, 인종 등, 온갖 이유를 들어 수많은 사람을 죽게 한 100년이었으니, 그의 주장에 아니다 할 수도 없다. 이 좁은 땅도 예외가 아니었다. 역시 ‘극단의 한 세기’였다. 35년이나 식민지 백성으로 살면서 ‘목숨 걸고’ 항거해야 했고 또 살아남아야 했다. 수많은 민간인들까지 동족간 전쟁으로 목숨과 가족을 잃어야 했다. 산업화도 전쟁하듯이 했다. 수많은 이들이 산업재해로 죽거나 다쳤다. 정치도 군사작전과 흡사했다. 고문과 투옥이 일상이었던 적도 있었다. 학교도 예외가 아니었다. 과열된 대입 경쟁은 흔히 전쟁으로 불렸다. 초중고등학교 과정은 대입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군사훈련에 다름 아니었다. 크고 작은 전쟁과 한(恨)들이 온 사회에 넘쳐났다. 문제는 21세기 들어와 19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위안부, 독도, 역사교과서 문제 등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얼마 전에도 반민특위가 한 정치인에 의해 도마에 올랐다. 이념갈등은 더 하다. 그 뿌리인 남북 관계는 최근까지 일촉즉발의 극한대결을 이어왔다. 지금도 툭하면 좌파, 친북, 빨갱이라며 타도 대상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평화를 구축하기 위한 지난한 시도들도 이적행위로 매도되곤 한다. 정치권만의 얘기가 아니다. 민주시민의 덕목과 사람됨의 도리를 가르쳐야 할 교육계도 마찬가지다. 겸손과 자비의 공동체여야 할 종교계도 다르지 않다. 맹신과 광기와 극단이 신성한 강단과 성전을 크게 위협하고 있다. 염치도 없고 수치심까지 팽개친 인면수심이 어디서나 넘쳐난다. 어느새 일상이 되어버린 ‘극단의 문화’, ‘극단의 행태’가 갖는 가장 큰 특징은 ‘과도한 이분법’으로 세상을 재단한다는 것이다. 매사를 선악으로 나누고 모든 사람을 적과 아군으로 구분한다. 말하자면 ‘전쟁 프레임’이다. 상대는 타도해야 할 적일뿐이다. 싸우는 것이 일이고 헐뜯어 쓰러뜨리는 것이 삶이 되었다. 이런 전쟁터에서는 누구라도 정신과 육신을 온전히 보존하는 것이 쉽지 않다. 둘째 특징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승리주의’, ‘일등주의’다. ‘전쟁 프레임’에서는 당연한 결과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겨야 한다고 믿는다. 공정한 룰과 경쟁, 신사적인 매너 등은 한가한 얘기다. 권모술수와 거짓말도 능력으로 대접받는다. 최근 가짜 뉴스가 범람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이기기 위해서라면 그보다 더한 일도 한다. 셋째는 ‘무조건 반대’하는 것이다. 상대의 주장은 반대부터 하고 본다. 설령 어제까지 내가 주장했던 내용이라도 상관없다. 적이라고 생각하니 당연하다. ‘반대를 위한 반대’, ‘싸움을 위한 싸움’에 사활을 건다. 넷째 특징은 협상과 타협이 없다는 것이다. 자칫 이적 행위로 간주될 뿐이다. 그러니 중간 지대도 균형이란 것도 없다. 모두에게 유익한 결론에 도달하기 위한 대화와 토론도 없다. 있더라도 형식일 뿐 대부분 천박한 우격다짐이거나 막말싸움이다. 다섯 번째 특징은 ‘무(無)논리’와 ‘반(反)지성’이다. 논리와 이성은 없고 감정만 나부낀다. 그것도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감정들이다. 예컨대 증오, 분노, 질투, 원한 등이다. 그런 감정들을 마음 한켠에 묻어두고 사는 선량한 이웃들까지 최대한 자극하고 부추긴다. 내 편에서 함께 흥분해 달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선동이다. 우리는 지금 반(反)지성과 선동의 전형을 목격하고 있다. 그것의 끝은 극단의 혐오사회와 공멸일 뿐이다. 2500년쯤 전, 플라톤은 철인 정치를 주장했다. 시민과 국가를 위해 봉사해야 하는 정치인에게는 엄격한 훈련과 자기통제가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비슷한 시기, 공자는 군자에 의한 덕치를 역설했다. 현대 민주주의와는 어울리기 쉽지 않지만 그들의 문제의식은 음미해 볼 가치가 있다. 역시 비슷한 시기,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고, 아리스토텔레스와 중국의 사상가들은 중용의 덕을 강조했다. 이성적일 것, 지나치지 않을 것, 신중할 것을 가르친 것이다. 예수와 석가모니도 겸손하라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다. 내려놓고 비우라고 했다. 서로 존중하는 고품격사회, 상생과 평화의 생명사회. 정녕 우리에겐 가질 수 없는 ‘유토피아’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