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슬 버리고 강산에 살기를 노래하던 가문 외세의 위협 앞에서는 목숨까지 내던져

기차 소리가 한낮의 고요를 깨뜨린다.임청각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石州 李相龍, 1658~1932) 선생의 생가이자 독립운동의 산실이다. 앞에는 시퍼런 낙동강이, 뒤로는 태백산 줄기 영남산(映南山)이 에워싼 배산임수의 명승절경에 자리 잡은 임청각(臨淸閣)은 그러나 잘려나간 마당에 가림막이 둘러쳐져 낙동강 조망을 막아 버렸다. 낙동강은 가까이 영양 일월산에서 발원한 반변천과 합수돼 남해로 긴 물줄기를 이룬다.안동시 법흥동 낙동강변에 위치한 임청각(안동시 임청각길 63)은 뻔한 위치임에도 정작 가는 길은 꽤나 복잡하다. 안동역에서 임청각길을 따라 안동댐으로 가다가 법흥육거리에서 왼쪽으로 중앙선 철길을 따라가면 만난다. ◆임청- 도연명의 귀거래사 시구임청각은 고성이씨 12세 이증의 셋째아들 이명(李洺)이 의흥군수를 내려놓고 중형 이굉(李宏)과 함께 중종 때인 1515년 건립했다. 고려 밀직부사를 지낸 이황을 시조로 하는 고성이씨는 조선 세종 때 좌의정을 지낸 향헌공 이원의 여섯째 아들 참판공 이증(李增)이 관직을 버리고 안동에 이거한 것이 정착의 시작이다.임청각은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동쪽 언덕 위에 올라 길게 휘파람을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노라(登東皐而舒嘯 臨淸流而賦詩)’라는 시구에서 ‘임청’을 따왔다. 당초 99칸이었는데 1940년 중앙선이 개통되면서 강제로 행랑채와 부속채 등이 철거되고 현재 70여 칸만 남았다. 이명의 아들 이굉(李肱)도 벼슬보다는 산수 간의 풍류를 즐기면서 유유자적한다. 백부가 지은 귀래정(歸來亭) 옆에 ‘갈매기와 벗한다’는반구정(伴鷗亭)을 건립한 것이다. 그 아들 이용(李容)도 반구정에서 만년을 보냈으니 삼대가 벼슬을 버리고 은거한 것이다. 3대가 과거급제 아닌 귀거래를 실천했으니 ‘고성이씨삼세유허비’가 세워졌을 만하다.중앙선 철길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고택 임청각에 들어서면 ‘국무령이상룡생가’라는 커다란 문패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단칸 맞배지붕의 문지방 없는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왼쪽 행랑채가 길게 늘어서 있고 바로 눈앞으로 군자정이 보인다.왼쪽 행랑채 쪽으로 들어가서 임청각 정침 마당에 선다. 바닥이 훤히 보이는 우물이 마당 한복판을 차지하고 있다. 임청각이 들어선 자리가 산비탈 청석자리여서인지 깊지 않은 우물물이 맑다.석주 선생의 종손 이창수(55)씨는 “우물 앞에 있는 사랑채는 3명의 정승이 난다는 태실이다. 석주와 철종 때 좌의정이었던 낙파 유후조가 여기서 태어났다. 그러나 이 후 외손들은 이 방에서 해산하지 못하도록 했다”고 말한다. 집 전체 구조는 일(日)자와 월(月)자를 합친 용(用)자 형태로 지어졌다. 해와 달을 지상으로 불러내려 그 정기를 받으려는 염원이 건축에도 담겨 있다. 동쪽으로 담장 샛문을 열고 들어가면 사랑채인 군자정(君子亭)이다. 현판 글씨는 퇴계가 썼다. 별당 건물로 기단 위에 누상주와 주하주로 구성된 군자정 누마루는 사방으로 계자난간을 갖춘 쪽마루를 돌려 지어졌다. 넒은 마루에는 석주 이상룡의 독립운동 과정이 영상물로 볼 수 있도록 했다.군자정에 있는 많은 현판은 임청각의 역사와 임청각을 지켜온 후손들의 정신이 새겨져 있다. 석주가 남긴 거국음(去國吟)과 아들 이준형의 피가 묻은 유서에서부터농암 이현보, 송재 이우, 의병장 고경명, 백사 윤훤, 파서 이집두 등의 시가 걸려 있다.임란 당시 전라도 의병장 제봉 고경명과 고성이씨 16세 이복원은 사돈간이었다. 고경명의 시 ‘제임청각’은 임란 직전 동래부사였던 고경명이 이복원의 회갑연에 참석해 임청각과 주변 풍광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이다.시판에는 고경명의 또 다른 별호 고태헌(高苔軒)이라 서명했다. 고경명은 두 아들과 함께 왜군이 영남에서 호남으로 진격하는 것을 막아내려다 삼부자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고경명의 큰아들 고종후의 아내 고성이씨는 16살인 시동생 고용후를 비롯한 식솔 50여 명을 이끌고 친정 임청각으로 피란 와서 지냈다.“당시에는 영호남 간 혼인으로 교류했으니 지역감정은 없었음을 보여준 것이다”라고 이창수씨는 말한다. 이후 안동에 피란 왔던 고용후가 과거에 급제하고 안동부사가 되어 내려왔다. 그는 피란 당시 은혜를 입었던 고성이씨 문중과 학봉 김성일 일가 등 사람들을 모시고 잔치를 베풀었다고 한다.종손 이창수씨는 임청각에는 ‘삼불차(三不借)’의 전통이 있다고 말한다. 3가지를 빌리지 않았으니 첫째가 자식의 대를 끊이지 않음이요, 둘째는 글을 빌리지 않았고 셋째는 돈을 빌리지 않았다고 자존심을 내건다. 분재기에 따르면 한 때는 노비만도 408명이나 되는 대가였고 한문공부도 나름 했는데 현재는 자신의 아버지(이철증)가 넷째였고 자신은 먼저 돌아가신 종손 (이도증)의 맥을 이었으니 삼불차도 이제 맥이 끊어졌다고 말한다. ◆독립운동의 성지임청각은 보물(182호)이기도 하거니와 근세에 와서 독립운동의 성지로 그 존재가치를 드높였으니 정부가 지정한 현충시설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8·15 경축사에서 “대한민국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상징하는 공간”이라 칭찬한 곳이기도 하다.임청각은 석주 이상룡을 비롯, 아들 이준형과 손자 이병화 등 3대에 걸쳐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명문가다. 석주의 부인 김우락과 동생(이상동·봉희), 조카(이형국·운형·광민), 당숙 이승화, 손부 허은 등 독립운동가로 서훈을 받은 사람만 11명이나 된다. 석주는 구한말 1905년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조직하고 지회장이 돼 협동학교를 설립하고 후진양성과 국민 계몽운동을 벌였다. 1910년 국권을 완전히 빼앗기자 이듬해 전 재산을 처분해 간도로 망명한다.54세의 나이에 아우 봉희와 외아들 준형, 조카 형국과 문형 등을 데리고 압록강을 건넜다. 그는 유학 서적을 접어놓고 가산을 모두 처분해서 가솔들을 데리고 만주로 떠난다. 이때 조상의 신주도 땅에 묻어 버려 임청각 사당에는 위패가 없다. 이런 석주의 정신은 이후 독립운동의 상징이 되고 있다. 만주에서는 길림성 류허현에서 신흥강습소를 열어 교포 자녀의 교육과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12년에는 계몽단체 부민단을 조직해 단장이 됐고 1919년 한족회를 조직해서 자치활동에 힘썼다.서로군정서를 조직해서 독판(督辦)으로 활약했고 1926년 임시정부에서 국무령이 돼 독립운동 최전선에서 싸웠다. 69세 고령으로 독립운동 일선에서 물러선 뒤 1928년 전민족 항일단체 통합에 노력하다가 1932년 5월12일 김림성 서란현에서 순국했다.석주가 순국한 뒤 귀국한 아들 동구 이준형은 일제의 추적에 월곡면 도곡리로 피해 있다 “일제 치하에서 하루를 더 사는 것은 하루의 수치를 더하는 것이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한다.만주로 망명한 석주가 임청각을 매각한 계약금을 갖고 갔다. 그러나 집안에서 계약금을 두 배나 주고 임청각을 되찾았다. 이를 두고 이창수씨는 “계약을 ‘물렸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당시 석주의 가족들은 호적을 만들지 않았고 임청각이 4명의 문중 대표 이름으로 소유권을 명의신탁했다. 석주의 손자 이병화가 명의자 4명을 찾아 해결하려 노력했으나 1명은 끝내 거절했다. 석주의 증손자인 이항증 선생(80·이창수의 숙부)이 최근까지 10여 년간 뛰어다니며 후손들을 상대로 소유권 말소 판결은 얻어냈으나 소유권 등기는 아직 해결되지 않아 공중에 뜬 상태다. 이항증 선생은 “보수적인 선비였던 석주가 종중 씨나락까지 팔진 않았다”며 일부의 임청각 소유권 주장을 일축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법원 소송에 비용도 많이 들었고 몸도 지쳤다”며 임청각의 소유권 문제는 국가에서 관리하는 것도 한 방법임을 시사했다. ◆탑동파임청각과 어깨를 맞대고 있는 탑동고택은 앞마당에 국보 16호 법흥사지 7층 전탑을 두고 있어 탑동파 고택이라 부른다. 신라 시대 법흥사가 있었던 자리라고 한다. 고성이씨 12세 참판공파 이증의 3남 이명이 임청각을 짓고 안동에 정착한 뒤 그의 손자 이복원은 다섯 아들을 둔다. 그 중 셋째 이적 (李適)은 처음 안동읍 남선면 현내리에 분가했다가 다시 임청각 기슭 영남산에 자리를 잡고 정착하니 그가 탑동파의 파조가 된다.탑동고택은 1천여 평 대지에 안채와 사랑채 정자인 북정 등과 잘 꾸며진 연못을 둔 아름다운 고택이다.조선 숙종 때 좌승지로 증직된 이후식이 안채를 건축하고 손자 이원미가 1719년 사랑채와 대청인 영모당을 완성했다. 대청 북쪽에 영조 때인 1775년 진사 이종주가 건립한 북정이 있다.임청각과 탑동종택이 모두 일제때 군부대가 수용되거나 철도 건설 당시 인부들 숙소로 이용되었는가 하면 철도 건설로 철거 훼손돼 옛날의 풍광을 찾을 수 없는 것이 아쉽다. 탑동파 종손 이재익(80)씨는 어릴 때 넓은 백사장에서 멱감고 놀았던 낙동강이 댐 건설과 환경변화로 자취를 찾을 수 없게 됐다고 아쉬워 한다. 2025년이면 중앙선 철로가 현 경북도청 쪽으로 이설되면 임청각과 탑동고택이 옛 풍경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문정화 기자 moonjh@idaegu.com

학의 부리서 빛나는 황금빛 불상 이목구비 가득 어린 온화함으로 깨달음의 순간 굽어살피신다네

가마솥더위가 이어지는 여름날 아침, 절집 기행에 나선다. 경북 경산시 남천면의 동학산(動鶴山)은 학의 형상이다. 그 이름도 학이 울며 날아와 앉았다하여 부쳐진 것이라 한다. 659년 신라의 승려 혜공이 한눈에 명당임을 알아보고 산 동쪽 자락 즉, 학의 부리에 해당하는 곳에 경흥사(慶興寺)를 창건했다. 절 터 좌우에는 학의 날개에 해당하는 산봉우리가 다시 하나씩 있고, 건너편 계곡 앞쪽으로 맑은 물이 흐른다. 이 계류는 금호강의 지류인 남천으로 흘러든다. 이러한 입지조건 때문에 신라시대에 이미 창건됐고, 고려시대를 거쳐 여러 차례 중건이 있었다고만 알려져 있다. 과거에는 4~5개의 부속 암자도 있었으며 가람 동쪽에 수십 명의 학승이 상주하던 큰 건물이 배치돼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의 말사이다. 외부와 차단된 지형적 특성을 지닌 때문인지 절집을 찾아갈 때도 내비게이션이 잠시 혼란스럽게 했지만, 입구까지 잘 데려다 준다. 돌계단이 나타난다. 막돌로 쌓은 석축 사이로 파르스름한 이끼가 잔뜩 붙어있다. 사람들이 자주 밟지 않은 계단인 것 같다. 절 마당까지 승용차가 바로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천천히 계단을 오르니 두 그루 은행나무 사이로 학이 날개를 펼친 것처럼 좌우 대칭의 기와지붕이 보인다. 그 사이로 대웅전이 좌정해 있다. 이 절의 유일한 금빛 보물이 있는 곳이다. 배롱나무 두 그루도 붉게 빛나고 있다.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이른 아침시간이라 법당 안은 조용하다. 누군가 한사람이 부처를 향해 계속 절을 올리고 있다. ‘경흥사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 . 경북 유형문화재였다가 2012년 2월22일 보물 제1750호로 승격됐다.원래는 지금의 명부전에 있었는데 1993년 대웅전을 완공하면서 이전·봉안했다. 1970년대 파손부위를 수리할 때, 본존불의 복장에서 1644년(인조22)에 작성된 복장기가 나왔다. 이로써 사찰의 창건연기는 물론 정확한 불상의 조성시기와 명확한 조성주체, 불상 제작자 등을 알 수 있었다. 조성발원문에 따르면 1635년부터 선승들이 동학산 남쪽 기슭에 새로운 사찰을 창건하고자 도모하였고, 수화원 청허(靑虛)를 비롯한 조각승들이 목조불상을 조성했다. 문화재청의 기록에 의하면 이 불상은 17세기 전국에 걸쳐 크게 활약한 조각승인 청허의 조각세계를 연대적으로 이해하게하는 자료이다. 조각의 경향에서도 양감이 절제되고 고요한 상호, 당당하고 균형 잡힌 신체비례가 돋보인다. 강직한 직선위주의 선묘, 주름표현 등에서 양식적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어 당시의 불상연구의 기준이 되는 중요한 자료라고 했다. 불상의 재료는 은행나무인데 옛날에는 절을 창건할 때 반드시 은행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훗날 불상을 조각할 때 그 은행나무를 재료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본존불인 석가여래좌상은 우선 크기에 있어서 높이가 1.58m이어서 위엄이 넘친다.등신대 크기의 황금빛 불상이 대좌 위에 앉아있으니 시선은 저절로 위로 우러러 보게 된다. 위엄을 갖춘 얼굴이지만 작은 이목구비가 온화함을 느끼게 한다. 손의 형태로 불교의 의미를 표현하는 수인은 깨달음의 순간을 알리는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양 어깨에 걸쳐진 통견 법의와 가슴 아래 수평으로 가로지른 주름이 잘 드러나 있다. 1.2m 높이의 좌우 협시불은 문수보살과 보현보살로 모두 화려한 보관을 썼다. 머리카락이 두 귀를 감싸면서 어깨 뒤로 내려 왔으며, 특별한 다른 장식은 없으나 우아한 모습이다. ◆수미단 부재이 절에는 또 하나의 문화재인 수미단이 알려져 있다. 불상을 모셔놓은 단을 불단 또는 수미단이라 한다. 이 명칭은 수미산(須彌山)에서 유래했다. 고대 인도의 우주관에서 세계의 중심에 있다는 상상의 산이다. 수미산 위에 불상을 모신다는 것은 부처가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등록된 이 문화재의 명칭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55호 ‘경흥사 소장 수미단 부재’ . 17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수미단은 현재 온전한 형태가 아니라 잔존 부재가 명부전 수미단의 일부로 삽입되어 있는 상태이다. 일반적인 수미단의 구조나 규모로 볼 때 지금 남아있는 부재는 원래 수미단의 1/5 혹은 그 이하의 양으로 추정된다. 조각기법 그리고 조각 면의 구성과 배치, 채색이 뛰어나 당시 불교 목조 공예품의 높은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목조삼존불을 안치할 때 지금의 명부전인 대웅전을 짓고 수미단을 제작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보기도 한다. 이 수미단은 한 단만 남아 있지만 옛 모습을 간직한 섬세한 조각을 볼 수 있다. 부재에 조각된 소재는 게·물고기·개구리 등의 동물, 연꽃·모란 등의 식물, 용·기린 등의 짐승들이다. 상상의 동물로 표현된 기린의 꼬리 부분은 비스듬히 하늘로 향했는데 붉은 색으로 외곽선을 칠하였다. 바람에 흩날리는 수염과 갈기도 달려 나가는 생동감을 더욱 고조시킨다. 색감도 근래에 덧칠한 흔적이 없어 고색이 완연하다. 정면 왼쪽 끝에는 검은색 게가 풀꽃 무늬 사이에 새겨져 있다. 앞면과 뒷면이 서로 뚫린 이중투각기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입체감이 더욱 돋보인다. 뛰어난 솜씨를 가진 목공이 혼신의 힘으로 칼질을 했을 것으로 느껴진다. 명부전을 나와 대웅전 뒤편 언덕을 오른다. 독성각, 산령각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오래된 몇 기의 부도가 한여름 뜨거운 햇살 속에 앉아있다. 부도는 수행자의 마지막 흔적이며 뒤를 잇는 사람들에게 정진을 당부하는 무언의 상징이다. 부도에는 수행 승려의 사리가 모셔져있다. 부도에 피어난 거무죽죽한 이끼의 흔적과 한여름 동학산의 짙은 녹음이 어우러진다. ◆승병의 훈련공간 경흥사는 임란 당시 왜군을 격퇴하기 위한 승병의 훈련공간이었다. 사적기에 의하면 승병들이 호국의 군사력으로 기여할 수 있도록 사명대사도 이곳에 머물며 역할을 했다고 한다. 승병의 근거지인 밀양 표충사가 이곳에서 멀지 않으니 그랬을 법도 하다. 구릉지에 모셔져 있던 많은 부도들은 오랜 전란을 겪으면서 계곡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고 한다.지금 남아있는 부도는 광복 이후 신도들이 수습해 보존될 수 있었다. 부도에는 각각 ‘해운당 치흠’, ‘금구당 선각’, ‘지월당 혜휘’ 같은 명문이 남아있어 주인을 알 수 있다. 거의가 별다른 장식이 없는 평범한 석종형 부도이다. 그래도 이 부도들은 그렇게 경흥사를 지키고 있다. 타고르의 신께 바치는 시, 키탄잘리의 한 대목이 생각나는 공간이다. ‘당신을 찬미하기 위해 나는 여기에 있습니다 / 당신이 머무르고 있는 이곳의 구석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절을 떠나기 전에 보물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을 한 번 더 보려고 대웅전을 옆문을 열었다. 끊임없이 절을 올리던 사람도 없고 법당은 텅 비어 고요하다. 황금빛 불상 앞에 조용히 앉았다. 누군가에게 절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만 볼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도 봐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절은 역사이고 문화이며 정신이니 그것을 읽어야 한다는 말로 이해한다. 천천히 불상을 바라보았다. 약간 살이 오른 얼굴 형상에 눈은 반쯤 떠서 코끝을 보는 상태이다. 양쪽 입술은 살짝 올려 미소가 있는 듯 없는 듯 편안한 표정이다. 문득 의심 한 덩어리가 안개처럼 떠올랐다. 나무를 재료로 만든 것으로 이토록 깨달음의 세계를 표현할 수 있는가 말이다. 그러니까 나무속에 이미 부처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인가. 부처는 제자들이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 참 모습이 왜곡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진리를 등불삼고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라고 했던 가르침은 바로 형상 그 너머에 있는 깨달음의 세계를 알아차리라고 한 것이다. 다시 절집을 나와 이끼 낀 돌계단을 천천히 밟으며 내려간다. 잘 자란 은행나무 두 그루가 배웅해 준다. 목조불상의 세계를 보고나서 나무는 죽어서도 살아서도 숨을 쉰다는 것을 알았다. 매미들의 긴 하모니도 들려온다. 여름이 깊어 간다. 글·사진= 박순국 언론인문정화 기자 moonjh@idaegu.com

망망대해 위로 ‘귀로’ 알리는 빛과 소리 우리 영토 지켜온 숭고한 마음 기억되길

등대는 외롭다. 외딴 곳에, 혼자, 서 있어서, 등대는 외롭다. 등대가 빛으로 어둠을 밝히고, 소리로 안개 속에 길을 내어 항구를 알리는 것은 외딴 곳에 혼자 서 있는 등대의 외로움, 외로움의 힘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달리 말해보자면 항구를 알리는 등대의 빛과 소리는 외로움의 꿈, 외로움의 육체이다. 등대의 외로움은 먼 바다를 항해하는 어부들의 외로움을 달래준다. 아무리 망망대해 난바다라 하더라도 돌아갈 항구가 저기 저 깜박이는 등대 곁에 있다는 것을 알면 얼마나 안심되고 푸근하겠는가. 요컨대 거친 바다로 출항한 어부들이 만선의 꿈을 싣고 무사안전하게 귀항할 수 있는 것은 등대의 외로움, 외로움의 힘이 등촉을 밝힌 빛과 소리로 말미암은 것이다. 한낱 감상이나 감정의 소모적인 부산물이기 십상인 ‘외로움’이 어떻게 어부들의 무사귀환과 단란한 식탁의 평화를 담보하는 빛과 소리, 그 생성과 숭고의 에너지로 승화될 수 있는 것일까. “얼어붙은 달그림자 물결 위에 지고/ 한 겨울의 거센 파도 모으는 작은 섬/ 생각하라 저 등대를 지키는 사람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과 같은 노랫말에서 보듯, 그것은 한 겨울의 거센 파도를 잠재워 작은 섬을 지키려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 가진 등대지기가 있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등대지기의 부재, 혹은 작은 섬을 지키려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이 소실된 상태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그 때 등대의 외로움은 평화의 담보가 아닌 고립무원의 표상으로, 등대의 빛과 소리는 구조를 요청하는 조난신호로 그 빛깔이 변한다. 작은 섬을 내 나라로, 등대지기를 나라의 책임자로 바꾸어 놓고 보라. 등대의 외로움은 고립무원에 처한 내 나라의 외로움이고, 등대가 쏘아 올리는 빛과 소리는 위기에 처한 내 나라, 대한민국의 딱한 처지를 알리는 외마디 절규가 된다. ◆경북도 기념물 제154호 지정죽변등대는 경북 울진군 죽변면 등대길 52(37° 03.5′N, 129° 25.8′E), 용의 고리처럼 생겼다는 용추곶에 외롭게 서 있었다. 갈매기만 저만치 멀어진 갯바위를 떠돌 뿐 주차장은 텅 비었고, 사무실 출입문에는 ‘출장중입니다’ 라는 안내 글이 붙어 있었다. 물론 등대는 자동시스템의 작동으로 제 일을 하겠지만, 사무실을 잠근 ‘출장중입니다.’ 안내 표지는 등대지기의 부재를 알리는 것처럼 곤혹하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죽변등대를 찾은 날은 마침 7월24일, 독도 상공에서 한국, 중국, 러시아 일본 공군기가 뒤얽혀 일촉즉발의 대치상황이 벌어진 다음 날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죽변등대는 높이 16m의 백색 8각형 콘크리트구조이다. 윗부분으로 갈수록 몸체가 작아져서 안정감과 수직 상승감을 느끼게 한다. 민흘림기둥에 둥근 머리를 얹고, 통풍이 잘 되도록 창문의 위치를 각 층마다 다르게 설치했다. 내부 계단은 철재 주물, 등대 안에는 1911년 일본의 수로부에서 설치한 대리석으로 된 수로측량 원표가 보존되어 있다. 천정에는 태극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원래는 대한제국 황실의 상징인 오얏꽃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고 전한다. 1950년 6·25전쟁 당시 폭격으로 등대 윗부분이 파손되었으나 보수공사로 건축 당시의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건축적 가치도 가치이지만, 등대가 갖는 역사적 의미가 깊어 경북도는 2005년 9월 기념물 제154호로 지정했다. 1910년 11월24일 최초로 불을 밝힌 이래 동해항로의 중간 지점, 울릉도와 가장 가까운 곳(128km)에 서서 20초마다 1섬광(빛이 닿는 거리 20마일), 50초마다 1회(소리가 닿는 거리 3마일)씩 빛과 소리를 보내는 광파와 음파 표지등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죽변등대는 1907년 일본사람들이 세웠다. 등대가 서 있는 육지 끝 용추곶은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해상을 감시하는 망루를 설치했던 자리였다. 또한 이곳은 왜구의 침범과 노략질을 방비하기 위해 신라시대 진흥왕 10년 보루성을 구축하고 화랑을 상주시켰던 곳이기도 하다. 왜구를 막기 위해 봉화를 올리던 그 자리에, 일본군이 망루를 설치하고 등대를 세우다니,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역사는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되풀이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해변을 들락거리는 파도처럼 아침에 읽었던 신문기사가 내 머릿속을 들락거렸다. “독도 상공에서 한국, 중국, 러시아, 일본 공군기 30여 대가 뒤얽혔다. 3시간 동안이나 일촉즉발의 대치 상황이 벌어졌다. 우리 영토에서 열강들끼리 세력 다툼을 벌이다 청일, 러일 전쟁이 터졌던 구한말 때와 안팎 사정이 판박이이다. 등장하는 국가까지 똑같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가! “우리 주권이 군사 · 외교적으로 위협받은 사태를 청와대와 여당은 먼 산 불구경하듯 한다. 일본의 수출 규제에 대해선 ‘일본 경제침략대책특위’까지 구성하더니 중 · 러가 영공을 침략해 오자 ‘기기 오작동이라더라’며 대신 변명해주기 바쁘다.” 제 정신 가진 등대지기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에 의하면, 죽변곶 봉우리 일대에는 대나무가 자생하고 있어 화살의 소재로 사용하기 위해 보호했다고 한다. 죽변(竹邊)은 대나무가 많이 자생한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 등대 주변에는 키 작은 대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대나무 군락 사이로 난 산책로가 용소(龍沼) 해안까지 닿아 있었다. 두 눈 부릅뜨고 왜군의 침략을 지키던 화랑들의 그 길을 천천히 걷는다. 바닷바람에 이따금 대숲이 일렁인다. 용이 승천하였던 곳이라 전해 내려오는 용소가 출렁거린다. 조선조적 용소는 베옷 입고 머리 풀어 기우제를 올리던 곳이었고, 지금은 마을 사람들이 풍어제를 올리는 곳,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 다지는 이 지역의 성소이다. 승천하는 용의 푸른 기상은 어디로 갔는가. 등대가 외로움의 까치발을 하고 망망대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초인이 그리운 시대7월25일, 북한은 원산에서 동해로 미사일 두 발을 발사했다. 등대지기가 아무리 둘러보아도 보이지 않는다. 한미연합사는 “북 미사일이 대한민국이나 미국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은 아니다”고 했다. 남한 전역을 때릴 수 있는 미사일을 우리 군이 추적도 못 했는데 이것이 위협이 아니면 무엇이 위협인가. 청와대 관계자는 다음날 26일 기자들이 북의 미사일 위협에 대해 아홉 번이나 묻는데도 “말씀드리기 어렵다”는 답변만 반복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가. 600km를 날아가는 탄도 미사일 발사가 남쪽이 아닌 동쪽을 향한 것이어서 직접적인 위협이 아니라니! 남쪽으로 쏘았다면 그건 위협이 아니라 폭격 아닌가. ‘용의 꿈길’이라 부르는 등대 주변 구불구불 이어진 대숲 길을 걷노라니 자책과 반성의 대나무 화살촉이 아프게 날아든다. 죽창가를 부른다고 의병이 봉기하겠는가. 의병이 봉기한들 일본과 벌이고 있는, 무역 전쟁에서 이길 수 있겠는가. 승천하는 용의 푸른 기상은 웰빙문화가 좀 먹은 지 이미 오래이고, 나라를 지키려는 생성과 숭고의 의로운 공동체의식은 무상복지의 달콤함에 함몰되고 없는 터에 의병봉기를 기대하다니, 망상에 가까운 착각이고 환상이다. 더더구나 믿고 따를 등대지기마저 보이지 않는 터에 죽창가를 외치다니, 정치인은 없고 정치꾼만 우글거리는 세태에 금 모으기 운동이라니, 이 무슨 해괴한 잠꼬대란 말인가. 죽변등대가 흰옷 입은 민초처럼 외롭게 서 있었다. 분노를 넘어 고뇌가 필요한 시대이다. 분노는 감정이어서 눈 앞을 흐리고, 고뇌는 지성이어서 선 자리를 헤아려 갈 길을 밝힌다. 전쟁이 국가를 만들었고, 국가가 전쟁을 만들었다는 윌리엄 맥닐의 명제에 밑줄을 그어보라. 감정의 돌팔매질, 선동으로 이길 수 있는 전쟁은 없다. 전쟁에 이기려면 줄을 맞추어 걷는 군사들의 대오, 전략이 필요하다. 평화로 평화를 지킨다는 발상은 얼마나 현실에 맹목인 낭만적 허상인가. 국제관계란 약육강식의 정글 논리이다. 정글은 힘없는 아이를 착하다는 이유만으로 지켜주지 않는다. 초인이 그리운 시대이다. 해가 지면 죽변등대는 등명기를 밝히고 안개 짙은 날에는 사이렌을 울릴 것이다. 그것은 등대지기를 부르는 외로운 마음의 표현일 것이다. 백마를 타고 오는 초인을 기다리는 애타는 파수꾼의 몸짓일 것이다. 초인은 어떻게 오는가. 거북선 횟집에서 천 년을 기다려도 죽은 이순신은 살아오지 않는다. 초인의 출현은 로또복권처럼 우연히 찾아오는 행운이 아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초인은 민족과 역사의 푸른 기상 속에서 비로소 형성되는 고뇌의 산물이다. 문정화 기자 moonjh@idaegu.com

드라마 '황금정원', 첫 회부터 파격전개… 막장스토리로 '화제'

지난 20일 첫 방송된 MBC 주말극 '황금정원(극본 박현주, 연출 이대영, 제작 김종학프로덕션)'이 첫 회부터 '막장스토리'로 화제를 모으고 있다.'황금정원'은 인생을 뿌리째 도둑맞은 은동주(한지혜 분)가 자신의 진짜 삶을 찾아내기 위한 과정을 담은 미스터리 휴먼 멜로 드라마다.사비나(오지은 분)에게 이름을 빼앗기고 고아로 자란 동주는 돈을 모으기 위해 행사가수 알바를 뛰다 사비나와 호텔 룸 바에서 맞딱뜨리게 된다. 첫 회부터 두 사람의 만남과 새엄마 신난숙(정영주 분)과의 충격적인 재회 등이 연이어 등장했다.닐슨코리아 기준 이날 방송은 2회 기준 수도권시청률 7.4%를 기록했으며 순간 최고 시청률은 8%까지 기록하며 흥행 청신호를 밝혔다.'황금정원'은 매주 토요일 밤 9시 5분에 4회 연속 방송된다.online@idaegu.com

연극 ‘나무꾼의 옷을 훔친 선녀’ 오는 28일까지 엑터스토리에서

연극 ‘나무꾼의 옷을 훔친 선녀’가 오는 28일까지 엑터스토리에서 진행된다.연극 ‘나무꾼의 옷을 훔친 선녀’는 2006년 대구시립극단 공연을 시작으로 13년간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작품이다. 이 외에도 서울 대학로 ‘제이제이글로벌’에서 2013~2014년에 장기 공연을 진행했고 동구문화재단 초청공연, 대구문화재단 우수작 선정, 소공연 특성화 지원사업 등 총 200여 회 이상의 공연을 했다.줄거리는 국가에서 결혼하지 못하는 청년들을 위해 결혼 사업을 추진한다. 정해준 여자와 결혼해 아이 셋만 낳으면 포상금으로 10억을 주는 큰 사업에 시범모델로 뽑힌 순박한 농촌총각 ‘백만석’은 돈이 목적이 아니라 ‘사랑은 감기처럼 아무도 모르게 찾아오는 것’이라며 자신을 순수하게 사랑해줄 사람을 찾는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서로 다른 목적으로 찾아오는 신선녀와 박복혜. 과연 백만석은 진정한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엑터스토리는 2008년 설립 당시부터 창작극을 중심으로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해온 지역을 대표하는 연극단체다. ‘레알도둑’, ‘개장수’ 등 다수의 레퍼토리 공연을 제작해 왔다.티켓 2만 원. 문의: 053-424-8340.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

레이나 맞아? 못 알아볼 정도의 동안 얼굴… 아이돌 비하인드스토리

애프터스쿨, 오렌지캬라멜로 활동한 가수 레이나의 근황이 화제가 되고 있다.자신의 SNS를 통해 팬들과 소통하는 레이나는 최근 자신의 사진을 올렸다. 사진 속 레이나는 갈수록 더 어려진 모습에 팬들은 "갈수록 어려진다", "여전히 스물 다섯 같아"는 등의 반응을 보이고 있다.레이나는 작년 8월부터 유튜브로 개인 방송을 시작해 꾸준히 활동 중이다.아이돌 활동 시절 비하인드 스토리, 개인 일상, 여행과 같은 다양한 컨텐츠를 업로드 하고 있으며 특히 게임 방송으로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online@idaegu.com

돌에 새긴 나라를 향한 ‘충정심’ 세월에 바래지 않은 ‘숭고한 맹세’ 되었네

폭염을 피해 피서도 하면서 요즘 유행하는 인문학에 대한 지식도 쌓으려면 어디로 여행을 떠나면 좋을까. 필자는 주저하지 않고 박물관을 추천한다. 만약 신라 1000년을 살펴보는 역사여행에 관심이 있다면, 10만여 점의 소장품을 지닌 국립경주박물관을 찾는 것도 좋을듯하다. 왜냐하면 경주는 도시 곳곳이 문화유산의 보고이지만, 유물의 전체 면모를 파악하고 각 유물의 퍼즐을 한 곳에서 맞춰보려면 박물관이 적격이기 때문이다. 경주박물관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관람객을 반기는 건물이 신라역사관이다.신라역사관에서 주의하지 않으면 지나칠 수 있는 높이 30㎝의 작은 비석이 오늘 소개하는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이다. 주지하듯이 역사를 연구하는 1차사료는 고문서나 금석문이다. 그런데 종이로 된 고문서는 시간의 한계 때문에 현재로부터 가까운 시기의 자료는 남아있을 수 있지만 돌에 새겨진 금석문처럼 1천 년 이상 보존되기는 어렵다. 그러나 1천400여 년 전의 금석문으로 추정되는 ‘임신서기석’에는 그 시절의 많은 정보가 고스란히 남아있어 우리로 하여금 관심의 추를 깊게 드리우게 한다. ◆우연하게 발견한 냇돌이 보물이 된 사연일제강점기였던 1934년 5월4일. 화창한 봄날에 조선총독부 박물관 경주분관 관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오사카 긴타로(大阪金次郞)라는 일본인이 경주시 현곡면 금장리 석장사(錫杖寺) 터 구릉에 묻혀서 윗부분이 드러난 30㎝ 남짓되는 자연석 냇돌(川石) 하나를 발견했다. “그것 참 신기한 돌이네.”고고학자로서 예사롭지 않은 호기심이 발동한 그는 지나치지 않고 돌을 캐낸다. 즉석에서 어렴풋이 보아도 빼곡하게 한자가 새겨져 있었다. 작은 돌을 가져와서 세척하고 상세히 살펴보니 한자가 선명하게 보인다. 그러나 전통적인 한문어법으로 된 글자들이 아니어서,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인지 잘 몰라 그냥 보관하고 있었다. 해가 바뀌어 1935년 12월18일, 마침 당시 역사학계에서 저명한 사학자였던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가 경주분관을 방문했다. 그는 박물관에 수집된 여러 비석 가운데 작은 이 돌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이 돌을 어디에서 발견했지요?”궁금증을 가진 스에마쓰는 오사카에게 돌의 출처와 발견경위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었다. 돌에 대해 설명을 듣고 면밀히 살펴본 뒤, 임신(壬申)이란 간지(干支)로 글자가 시작되고 내용은 두 사람이 서로 서약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예로부터 작자미상의 빗돌이나 서예작품은 문장의 첫 단어를 제목으로 붙여 온 것을 아는 그는 “이 빗돌의 이름을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으로 합시다”라고 제안한다. 바로 ‘임신’으로 시작되는 문장의 첫 글자를 따고, 문장의 주요내용인 서약을 덧붙여 ‘임신년에 서약을 기록한 돌’이란 의미로 이 냇돌은 ‘임신서기석’이란 임시이름을 얻게 되었다. 스에마쓰는 이 돌에 새겨진 글자를 집중적으로 판독하고 연구하여 이듬해인 1936년 경성제대 사학회지 제10호에 ‘경주출토 임신서기석에 대해서’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이로부터 임신서기석이란 명칭을 얻어 오늘날까지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2004년 6월26일 이 냇돌은 대한민국 보물 제1411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임신서기석은 경주박물관에서 관객의 시선을 받고 있다. ◆ 임신서기석의 내용과 서예사적 의미임신서기석은 경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반질반질한 자연석 점판암제(粘板巖製)다. 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길쭉한 형태로 높이가 34㎝, 너비는 윗부분 가장 폭이 넓은 곳이 12.5㎝이다. 두께 약 2㎝의 돌에 1㎝ 정도 크기의 한자(漢字)가 음각으로 한 면에 5줄 74자가 새겨져 있다. 이 작은 자연석 빗돌에 새겨진 내용은 무엇일까. “임신년 6월16일에 두 사람이 함께 맹세하여 기록한다. 하느님 앞에 맹세한다. 지금으로부터 3년 이후에 충도(忠道)를 지키고 허물이 없기를 맹세한다. 만일 이 서약을 어기면 하느님께 큰 죄를 지는 것이라고 맹세한다. 만일 나라가 편안하지 않고 세상이 크게 어지러우면 ‘충도’를 행할 것을 맹세한다. 또한 따로 앞서 신미년 7월22일에 크게 맹세하였다. 곧 시경(詩經)·상서(尙書)·예기(禮記)·춘추전(春秋傳)을 차례로 3년 동안 습득하기로 맹세하였다. (壬申年六月十六日 二人幷誓記 天前誓 今自三年以後 忠道執持 過失无誓 若此事失 天大罪得誓 若國不安大亂世 可容行誓之 又別先辛末年 七月卄二日 大誓 詩尙書禮傳倫得誓三年)” 비문내용의 핵심은 신라의 두 청년이 나라에 충성을 맹세하고, 유교 경전 학습에 대한 맹세를 기록한 것이다. 특히 신라가 한문을 받아들여 표기수단으로 삼을 때 향찰식(鄕札式) 표기, 한문식(漢文式) 표기 외에 훈석식(訓釋式) 표기가 실제로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금석문이다. 예를 들면, 天前誓(하늘 앞에 맹세한다)를 한문 문법에 맞게 쓴다면, 서전천(誓前天)이 되어야 하는 데 우리말식 한문으로 새겨놓았다. 게다가 세속 5계 중의 교우이신(交友以信) 즉 신라 화랑들의 믿음을 맹세한 내용과 우리 민족의 고대 신앙 중 ‘천(天)’의 성격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등 사료적 가치가 높은 금석문으로 평가된다. 그런데 이 빗돌이 언제 만들어졌는지에 관해 여러 설이 분분하다. 처음 빗돌에 관련된 논문을 발표했던 일본인 스에마쓰 야쓰카즈(末松保和)는 명문의 임신년(壬申年)을 통일신라시대 732년(성덕왕 31)으로 보았다.그 이유는 신라에 국학이 설치되어 체제를 갖춘 것이 682년(신문왕 2) 이후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방 후 이병도는 552년(진흥왕 13)이나 612년(진평왕 34)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근거로 국학이 도입되기 전부터 중국에서 들어온 유교경전을 화랑과 지식인들이 널리 읽었다는 ‘삼국사기’ 기록을 제시하고 있다. 최근 서예학계에서도 6세기 신라의 다른 비석과 임신서기석의 서체를 비교하여 결구, 장법, 획법, 그리고 명문의 새김방식에서 유사한 특징을 보여주기 때문에 552년 혹은 612년으로 보고 있다. 예컨대 문장형식을 갖춘 신라의 금석문은 6세기 들어서면서 중성리비(501), 냉수리비(503), 무술오작비(578) 등과 같이 대부분 자연석에 새긴 금석문이란 점에서 임신서기석과 비슷하다. 7세기 후반에 무열왕릉비(661)와 같이 귀부(龜趺, 거북 모양으로 만든 비석의 받침돌)와 이수(螭首, 용(龍)의 형상을 조각하여 수호의 의미를 갖도록 한 비신(碑身)의 머릿돌)를 갖춘 정형화된 개인의 묘비가 출현하는 것으로 보아서 역사다리꼴의 자연석에 귀부와 이수가 없는 임신서기석은 삼국통일 이전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임신서기석의 장법(章法, 주어진 지면에 문자를 효과적으로 배치하는 방법)은 행서의 장법을 취하고 있다. 세로줄은 대충 맞추고 있으나 가로줄은 맞추지 않아 자유스럽다. 글자 크기는 윗부분은 돌 크기에 맞춰 행간(行間)을 넓게 하고 아랫부분은 행간을 좁게 처리했다. 서체는 해서에 예서와 이체자(異體字)가 보이기도 한다. 장법은 6세기의 냉수리비(503), 봉평비(524), 청제비(536) 등과 유사하며, 결구(結構, 글자를 이루는 획의 구성과 짜임)도 광개토대왕비(414), 적성비(551), 명활산성비(551) 등과 유사하여 552년에 새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빗돌의 서예미는 석질에 맞춰 획을 자연스럽게 구사하면서 굳센 필획미가 드러난다. 당시 중국의 글씨와는 다르게 신라만의 질박함을 보여주는 소박한 결구도 세로로 긴 장방형, 납작한 형태 혹은 정방형 등 획일적이지 않아 천진무구해 보인다. 특히 마지막 년(年) 자는 공간을 보공하기 위해 세로획을 길게 처리하여 눈길을 사로잡는다. ◆ 두 화랑의 꿈과 맹세임신서기석에 등장하는 청년들은 누구일까? 이들은 신라의 화랑이라는 견해가 중론이다.화랑(花郞)은 글자 그대로 꽃미남을 의미한다. 필사본 ‘화랑세기’에 기록된 화랑도의 수장은 풍월주(風月主)이다. 풍월주는 540년 처음 설치되어 681년 폐지되었으며, 32명의 화랑에게 승계되었다. 초기의 풍월주는 얼굴이 옥과 같고 꽃처럼 고상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인물이 무척 준수했던 것으로 살펴진다. 후기는 풍채가 좋다거나 태양처럼 빛난다는 인물평이 보인다. 따라서 화랑은 문(文)과 무(武)를 겸비하고, 얼굴은 꽃미남이며 풍채가 출중한 사람으로 오늘날 아이돌 스타에 버금가는 스타였다. 그들은 국가에 대한 충성심도 높아 삼국 가운데 가장 약소국이었던 신라가 통일을 이룬 원동력이 되었다. 무엇보다 이 빗돌에 화랑 두 사람이 맹세한 말을 적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특히 두 화랑은 약속을 할 때 ‘3년’의 기한을 설정하고 하늘에 맹세한다. 그 기념으로 “우리 두 사람의 맹세를 돌에 새기자”고 하면서 빗돌을 세웠을 것이다. 그리고 그 돌을 보면서 호연지기를 기르며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정진한 뒤, 국가의 간성(干城)이 되었을 것으로 가늠된다. 1천400여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들의 숭고한 맹세를 임신서기석을 통해 느끼게 된다. 정태수(서예가·대구경북서예가협회 이사장) 문정화 기자 moonjh@idaegu.com

본보 ‘경북의 문화재’ 필진들 “우리의 정신문화,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쾌거”

‘한국의 서원’ 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소식에 본보 ‘스토리로 만나는 경북의 문화재’ 필진들은 “우리의 정신문화가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쾌거”라며 기뻐했다. 2017년 1월 영주 소수서원과 올해 2월 경주 옥산서원을 다녀와 글을 남긴 이경우 언론인은 “대한민국이 오늘 여기까지 온 것은 선조들의 유산 덕분이고 가르침이며 그 정신이 우리 핏속을 흐르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라며 환호했다. 그는 당시 소수서원 글에서 1549년 풍기군수로 온 퇴계 선생으로 인해 소수서원이 일대 전기를 맞았음을 적고 있다. 퇴계선생이 소수서원 사액을 받아내고 전국의 유생이 몰려들면서 풍기군수 주세붕이 성리학을 도입한 안향을 배항하고자 세운 백운동서원이 일대 전기를 맞음을 알렸다. 퇴계 또한 소수서원에서 강의하는 등 고종 25년 마지막 유생을 받아 총 4천300명을 교육했음도 적었다. 특히 그는 당시 정치적 상황을 의식한 듯 “대통령 탄핵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이 국민의 일상까지도 짓눌러놓아 새해를 맞는 국민의 마음이 무겁다”며 “소수서원을 찾아 어려울때일 수록 원칙과 지조를 지킨 선비들의 가르침을 되새긴다”고 글을 마무리했다. 2013년 1월 안동 도산서원에 대한 스토리를 입혔던 정태수 서예가는 도산서원의 등재 소식에 “도산서원은 퇴계 선생의 학문과 사상이 녹아있는 한국선비문화의 중심”이라며 “이번 기회에 중국인들도 부러워하는 추로지향(鄒魯之鄕 공자와 맹자의 고향, 즉 예절을 알고 학문이 왕성한 곳)의 진면목을 제대로 알리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축하했다. 그러면서 그는 “문화가 경제”라며 “우리도 이런 고급 문화를 갖고 있다는 자긍심을 가졌으면 한다”는 바램을 보였다. 특히 당시 글에서 서예가 출신 답게 최고 명필 한석봉이 선조가 부르는 ‘도산서원’이라는 사액현판을 휘호할때 생긴 일화를 소개해 눈길을 끌었다. 2017년 11월 안동 병산서원을 쓴 강현국 시인은 휴식과 강학의 복합공간인 장대한 누각 만대루를 언급하며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축하했다. 그는 “만대루가 한국선비문화의 향기를 느끼는 세계인의 창문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본보 ‘스토리로 만나는 경북의 문화재’는 2012년 4월 시작돼 지금까지 경북의 문화재 270여 편을 탐방, 과거와 현재를 잇는 스토리로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문정화 기자 moonjh@idaegu.com

대구 대명문화마을사업단, 대명스토리텔러 참가자 모집

대구 남구청이 오는 19일까지 대명문화마을사업단에서 ‘대명스토리텔러’ 참가자를 모집한다.대명스토리텔러는 대명문화마을사업의 주요 프로그램 중 하나인 온라인마케팅 교육이다.교육은 오는 10월까지 6회에 걸쳐 진행된다. 블로그,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주제로 한 마케팅 전문 강사 특강 및 실습, 피드백으로 이뤄질 예정이다.대명 2·3동 거주 및 활동자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신청 및 문의는 할로대명 블로그(https://blog.naver.com/2018hallow) 또는 대명문화마을사업단으로 하면 된다. 문의: 053-625-2338.한편 대명문화마을사업단은 문화체육관광부의 문화특화지역 조성사업에 대명 2·3동이 공모에 선정돼 내년까지 문화마을 사업을 추진한다.구아영 기자 ayoungoo@idaegu.com

가문 대대로 이어진 ‘애국의 피’…임진왜란부터 일제시대까지 구국의 선봉에 서다

안동에서 영덕으로 가는 34번 국도변 임하댐 아래, 번듯한 경북독립운동기념관이 마을을 지켜주고 있다.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의성김씨 집성촌 ‘내앞마을’이다.영양 일월산의 지맥이 동남쪽으로 내려오다 서쪽으로 흘러오는 낙동강 지류인 반변천과 만나 이뤄진 전형적인 배산임수형 마을 ‘내앞’. 밝은 달 아래 귀한 사람이 입을 옷을 세탁하는 모습을 닮은 ‘완사명월형’이라며 내로라하는 풍수가들이 모두 우리나라의 최고 길지중 하나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 내앞마을. 귀봉종택은 그 내앞마을 의성김씨 집성촌에서 작은 종가로 통한다. 종가가 엄존하고 종손이 있는데도, 둘째의 작은 종가가 대를 이어오는 전통이 귀봉종택의 위상이다.중시조인 청계 김진에게는 다섯 아들이 있었으니 첫째 약봉 극일, 둘째가 귀봉 수일, 셋째가 운암 명일, 넷째가 학봉 성일, 다섯째가 남악 복일이다. 아들 셋이 문과에 오르고 둘이 생원에 합격했으니 세상에서는 ‘오자등과댁’이라 불리었다. 청계를 불천위로 모시는 약봉 극일의 후손이 대종택을 중심으로 종가를 이어오고 있는 가운데, 둘째 귀봉 수일의 아들 운천 김용이 불천위로 모셔지면서 일가를 이루었으니 작은 종가로 분파한 것이다. 의성김씨 대종택과 이웃해서 귀봉종택이 자리잡고 있지만, 골목 입구는 다르다.길게 이어진 골목 끝에 있는 대문채를 들어서면 위압적이지 않은 넓은 마당이 귀봉종택의 위상을 설명해준다. 경북도 민속자료에서 중요민속문화재 267호로 승격된 귀봉종택 사랑채에는 지난 해 가을 불천위 제사를 모실 때 제관들의 소임을 적어놓은 집사기가 아직 그대로 붙어 있다. 이곳에서 해마다 10월 운천 부부의 불천위 제사를 각 각 모셨는데, 올해부터는 운천의 제삿날 두 분을 함께 모시기로 했다고 종택을 관리하는 후손 김상태(57) 씨는 말한다. 제사도 시류를 거스를 수는 없는 모양이다.안채는 보통 양반 민가의 口자보다 훨씬 넓은 ㄱ자형 정침이 여성 공간인 안채와 사랑채, 부엌칸을 이어달아 6칸 넓은 대청이 종택 살림을 짐작케 해 준다. 정침의 이층 다락방 규모나 사랑채의 마루, 제사공간은 종택으로서의 위상을 보여주고 있다. ◆운천 김용과 호종일기운천 김용은 귀봉의 장남으로 향시에 장원하고 33세에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에 들어갔다. 이듬해 예문관에 발탁될 정도로 왕의 신임을 받았다. 천연두로 고향에 내려와 있던 36세에 임진란이 일어나자 안동수성장으로 ‘모병문’을 지어 의병을 모집하고는 직접 지휘해 왜적을 막아냈다. 운천은 모병문에서 ‘국토가 잠식당하고 또 안으로 나라 기강이 무너진다면 모두 멸망할 수밖에 없다’고 경고하고, “군부를 섬기는 백성으로서 한 번 죽기를 결심하고 결연히 의병 모집에 호응해달라”고 호소했다. 임란 당시 그의 집에는 안집사 백암 김륵이 와 있었는데, 그는 백암과 예안 현감 신지계 등과 함께 의병 결정을 논의했다. 운천은 동생 대박 김철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고, 선두에서 왜적을 막아냈으니 그의 집이 ‘안동 의병 결성의 산실’이었다고 종손 김승태(66)씨는 증언한다. 왜적의 침입으로 선조가 의주로 파천한 뒤 임금을 호종하면 쓴 호종일기(1593년 8월부터 1594년 6월까지)가 있다. 운천이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으로 호가하면서 기록한 호종일기는 보물 484호로 지정돼 지금 국학진흥원에 보관돼 있다. 호종일기는 행재소에서 사관들이 호종하면서 당시의 정사를 기록한 1차적 사료로서 당시의 생활상은 물론, 정치 군사 외교 등 다방면의 자료들을 기록해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특히 왜란 당시 병사 4만을 이끌고 우리나라를 도우러 왔던 명나라 제독 이여송과 대장 양원, 오유충과 유정을 비롯한 여러 장수와 군졸들의 언행과 생활, 그리고 이들을 대접하며 여러 면에서 대면했던 접반사 이덕형과 김수 윤두수 심희수 이항복 심수경 장운익 등의 활약이 소상히 기록돼 있다. 예문관에 있을 때는 가차 없는 직필로 난세에 맞섰고, 사간원 시절에는 기축옥사에서 부당하게 희생당한 최영경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합계를 올려 주위 사류들을 통쾌 찬탄케 했다고 미수 허목은 묘비명에 적었다. 홍문관 사헌부 시절 지론이 정직해 조정과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던 것이다. 그의 직설은 춘추시대 신하의 말을 듣지 않았다가 전쟁에 패한 목공의 예를 들면서 광해군의 실덕을 거론해 왕의 과오를 성심으로 바로잡으려 했을 정도였다고 후손들은 전한다. 임진란 이후, 당쟁이 치열해 지면서 북인 정권에서 외직으로 밀려난 운천은 선산부사와 상주목사, 예천군수와 홍주 여주 목사 등 다섯고을의 목민관을 지내면서 가는 곳마다 선정을 펼쳐 지역민의 칭송을 받았음이 묘비명과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다. 임진란 7년 전쟁으로 나라 곳곳의 민생은 피폐해졌고 민심마저 흉흉했으나 운천은 무너진 나라 기강을 지역에서부터 바로 세우고 파괴된 국토를 복구해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는 백성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풍속을 선도하기 위해 솔선 실천했다. 일생을 벼슬에도 명리에 휘둘리지 않고 청빈을 부끄러워하지도 않았으며 나라와 백성이 필요로 할 때는 몸을 바쳤으니 오로지 나라와 참다운 군자의 길을 걸었던 운천 김용으로 역사는 기록한다. ◆독립운동과 의성김씨 귀봉파항일독립운동사에서 안동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고, 그 중에서도 의성김씨의 희생과 헌신은 단연 돋보인다. 독립운동사에 따르면 내앞마을은 1895년 의병항쟁에서부터 독립운동에 나섰다. 일제의 조선 침략이 노골화되기 시작한 1904년 안동 유림들이 위정척사의 애국 계몽운동을 벌이기 시작했으니 그 시발점이 내앞이다.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 기지를 세우고 가산을 독립운동에 쏟아 부었던 운천의 후손들은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받아 훈장과 포장을 받은 사람만도 18명에 달할 만큼 수많은 사람들이 구국 항일 호국운동에 몸담았다. 경북도독립기념관이 내앞마을에 들어선 것이 의성김씨 가문의 정신적 물질적 기여에 보답하는 차원이기도 했으니, 귀봉종택이 항일 국난 극복의 산실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강윤정 경북도독립운동기념관 학예연구부장은 말한다. 귀봉 김수일의 11대손인 비서 김대락은 사재를 털어 근대식 교육기관 협동학교를 여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1910년 치욕적 병탄으로 나라가 망하자 만삭의 손부와 손녀까지 대동하고 만주로 망명을 선택한다. 백두산 아래 한인이라는 뜻의 ‘백하’로 불렸던 것도 그때부터다. 경북도 기념물 137호인 ‘백하구려’는 현재 김대락의 종증손 김시승(83) 씨가 거주 관리하고 있다.정면 8칸으로, 서쪽 4칸은 사랑채이고, 동쪽 4칸은 중문간을 비롯한 아래채이다. 사랑채에 걸린 ‘백하구려’ 라는 현판 때문에 그렇게 불리는데, 비서 김대락이 만주로 망명가서 백하라는 호를 썼고, 이 집은 김대락이 만주로 망명하기 전 협동학교 교사로 사용됐던 곳이다. 김 씨는 “지금의 백하구려는 협동학교 당시의 집이 아니다. 협동학교를 설립하고 간판 붙일 곳이 없어 당시 초가집에 간판을 붙였는데, 독립운동을 하러 만주로 망명간 뒤 협동학교 교실로 쓰던 10칸이 뜯겼다. 지금 문화재청에서 복원해 주겠다는 제의도 있지만, 지금 집도 관리하기 힘들다”며 거절했다고 말한다. 김대락의 누이 김락은 독립운동의 한가운데를 지킨 여성 독립운동가다. 파리장서 의거라 부르는 1차 유림단 의거의 핵심 이중업의 아내이자, 단식 순국한 의병장 이만도의 며느리이며, 광복회와 제2차 유림단 의거에 참여한 이동흠 이종흠의 어머니이다. 그녀는 3·1만세시위에 참가했다가 일본 경찰에 끌려가 고문 끝에 두 눈을 모두 잃는다. 일송 김동삼은 본명이 김긍식이다. 그도 만주로 망명해서 이름을 동삼으로 바꾸었다. 김대락과는 같은 집안의 족질관계다. 항일운동을 하면서 협동학교를 설립하고, 또 만주로 떠날 때도 서로 의논했으며,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하면서도 동지 이상으로 혈족의 의리를 보여줬다. 만주에서는 서로군정서의 참모장으로 청산리전투에도 참여했으며, 임정 국무령 이상룡이 국무위원으로 임명했으나 항일무장투쟁을 위해 취임하지 않았다. 1931년 하얼빈에서 일경에 체포돼 국내로 압송돼 평양법원에서 10년 형을 선고받고 옥살이 중, 1937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다. 그의 유해를 거둬들여 장사지내 준 만해 한용운이 일생 한 번 울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올 만큼, 선생의 애국 항일 운동과 투철한 민족 독립정신은 후세 귀감이 되고 있다. 일송 김동삼의 평가와 대우에 대해 김시승 씨는 “안동의 독립운동을 연구하는 역사가들이 내앞마을에 와서 ‘진정한 의미의 독립운동가는 일송 한 사람 뿐’이라는 칭송을 들었지만, 내앞마을에는 김동삼의 생가 표지석 하나가 전부”라며 섭섭해 한다. “일송의 항일투쟁 독립운동 공적이 남정현 지사나 신돌석 장군의 공적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며 공적이나 평가에 비해 정부나 학계의 대접이 섭섭한 면이 있음을 내비친다. ◆백운정과 의성김씨내앞마을에서 반변천 건너 나지막한 산등성이에 자리잡은 백운정은 청계 김진의 뜻에 따라 아들 귀봉이 41세때 지어 후학들을 가르치며 만년에 힐링하던 곳이다.동향으로 내앞마을을 조망하고 있는 백운정 마루에서 반변천을 바라보면, 강물이 호수처럼 드넓게 펼쳐져 내앞마을을 지켜주는 개호숲과 함께 한 편의 동양화를 이루고 있다. 귀봉의 아들 운천 김용은 병조참의와 명나라의 사신으로 갈 동지사에 제수되었으나, 세상은 광해군 등극 이후 북인의 횡포가 더해지면서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상황에 이르자 세도의 뜻을 단념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지낸 곳이 백운정이다.400여년 전 귀봉과 운천 부자 생전에는 얕은 내를 건너다녔을 것이 지금은 강을 따라 보조댐까지 가서 강변으로 거슬러 가야 한다. 안내하는 귀봉의 후손 김상태(57)씨는 “임하댐이 건설 되기 전 어릴 때는 반변천을 건너 백운정을 찾았다”고 회고한다. 임하댐 건설로 넓은 모래밭이 지금은 호수가 되어 버렸으니 옛 정취는 시구와 이야기로만 전해지고 있다. 백운정 누마루 현판은 미수 허목이 썼는데, 백운정 마루에서 강변 풍경을 보면 글씨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정말 정자와 주변 풍광을 절묘하게 묘사한 글씨임을 느낄 수 있다. 많은 현판 중에는 퇴계 이황의 조양문과 이락문 두 편도 걸려 있다. 귀봉의 후손들이 관리하는 백운정은 여러 차례 중수를 했으나, 문화재가 아니어서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고 있다. 푸른 색 페인트로 서까래와 목조건물을 보호하려는 듯 페인트칠을 해놓아 아쉬움을 주고 있다.〈이경우 언론인〉문정화 기자 moonjh@idaegu.com

그 시절 그 거리의 추억이 ‘새록새록’…근대를 걷는 ‘시간여행자’ 돼볼까

6월은 잘 익은 보리를 베어내는 계절이다.그때는 낡은 정미소도 탈탈 털털 요란한 소리를 내며 활기를 띠었다. 앞마당에 넘치던 나락 냄새까지 풍요롭던 세월, 정미소는 마을의 중심이었다. 오랜 시간의 흔적이 담겨있는 공간들을 찾아본다. ‘장소’를 단순한 물리적 영역을 넘어서 새로운 개념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지난해 이맘때 쯤 문화재청은 근대문화유산의 효과적인 보존 활용을 위해 선(線)과 면(面) 단위의 문화재 등록 제도를 새로 도입하기로 했다. 근대 시기에 형성된 거리, 마을, 경관 등 역사문화자원이 집적된 지역이 그 대상이 됐다. 지금까지는 문화재 등록 대상이 건축물이나 문헌 위주의 점(點) 단위였다. 이로써 급속하게 진행된 도시화로 고유의 경관을 잃어가는 마을이나 거리 등을 폭넓게 보존·활용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첫 사례로 경북 영주 근대역사문화거리와 전북 군산과 전남 목포의 일정 지역을 문화재로 등록한다고 예고한 것이 딱 1년 전의 일이다.그 후 30일간의 기간을 거치고 심의를 통과해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문화재청은 공고문을 통해 ‘영주 근대역사문화거리’는 철도역사와 그 배후에 형성된 철도관사, 정미소, 이발관, 근대한옥, 교회 등 지역의 근대생활사 요소를 간직한 건축물이 집적되어 있다며 영주동 관사골에서 광복로 일대의 거리와 6군데의 개별 공간구조물을 등록문화재 제720호로 지정한다고 발표했다.이는 전국 최초로 마을단위의 역사공간이 등록문화재가 된 셈이다. 영주 근대역사문화거리는 근대시기 영주시의 형성과 발전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핵심 공간이다. 이곳에는 1920년부터 60년대 사이에 조성된 건물 들이 있다. 옛 영주역 5호 관사와 7호 관사, 영주동 근대한옥, 영광이발관, 풍국정미소, 영주제일교회 등이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역사적 공간이다. 그 동안 개발로 인한 철거 위기도 적지 않았다. 한국전쟁과 개발논리에도 살아남은 이 6곳의 건물이 근대역사문화거리의 주축이다. 광복로와 두서로 일대에 모두 반경 300미터 남짓 안에 자리하고 있다. 걸어서 둘러보기로 했다. ◆영주 풍국정미소(등록문화재 제720-5호)붉게 녹슨 철문을 열어주는 주인 우길언(82)씨를 따라 정미소에 들어서니, 높은 천정에 달린 큰 크랭크축과 벨트가 옛 정취를 느끼게 한다. 하얗게 먼지가 내려앉은 게 수년간 영업을 하지 않은 듯하다. 어두컴컴함 속에서 낡은 기계들이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다. 슬레이트 지붕 사이로 들어온 자연광이 내부를 희미하게 밝히고 있다. 1966년부터 부터 직접 이곳에서 일했고, 정미소와 함께 늙어가는 우 씨는 2010년대 초에 시대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기계를 멈췄다고 한다. 더 이상 ‘윙윙윙~털털털...’하는 요란한 소리는 들리지 않고 고요하기만 하다. … ‘숨 가쁘게 달려왔으나 결국 실패하고 만 늙은 혁명가’ / ‘그 풍경을 나는 이제 사랑하려 하네’…. 안도현 시인은 ‘정미소가 있는 풍경’이라는 시에서 정미소를 이렇게 표현했다. 범상치 않은 아우라를 뿜어내는 건물을 보고, 비록 실패한 혁명가일지라도 그 존재만으로도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 이 공간에는 요즈음 시간의 흔적을 보러오는 이들이 더 많다.얼마 전 기계를 연구하는 공학도들이 서울서 찾아와 이틀간이나 머물면서 자료를 수집해 갔다. 근대 산업 시기부터 운영된 정미소로 양곡 가공업의 생성과 양곡 유통에 관련한 역사가 고스란히 존재하고 있다. 건축형식과 목재 설비구조, 도정 기기들 외에도 판수동 저울 등 당시의 정미소와 관련된 기구가 세월의 먼지를 쓰고 숨 쉬고 있다. 장소 자체가 양곡 가공과 곡물 유통의 산업사적 가치가 있는 곳으로 보인다. 당국에서는 향후 이곳을 양곡 가공과 곡물 유통을 주제로 한 산업문화관, 쌀 카페, 도정 참관 및 판매장으로 활용하면 가치가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영주역 5호 관사(등록문화재 제720-1호)와 7호 관사(등록문화재 제720-2호)영광중학교 옆 가로수 그늘을 따라 오르막길을 걸어 관사골을 찾아 갔다. 어린이공원이라 불리는 작은 동산위에 오르자 영주동을 중심으로 시가지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영주의 진산(鎭山)이라 일컫는 해발 276m의 철탄산이 내려다보고 있다. 일제강점기부터 영주는 철도 교통이 발달해 철도 종사자들로 붐볐고, 역무원들의 관사도 늘어나 현재 두서길 일대는 관사골로 불린다. 1942년 중앙선이 개통되고, 영주역이 중간 역으로 역할 한 것이 영주시가 근대도시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 일대는 고려 말·조선 초 시기 유적을 비롯해 광복, 6·25전쟁 전후의 근대건축물이 다수 존재하는 곳이다. 영주 근대도시 형성과 발전의 산 역사가 된 장소이기도 하다.부근에는 다른 관사도 남아있지만 내부공간구성, 외관형태, 구조 및 재료의 보존상태가 좋으며 원형 보존이 잘 된 '5호 관사'와 '7호 관사'를 등록문화재로 지정했다. 1935년 지은 건물로 일본식 목조 관사주택의 전형을 보여주는 건축물 중 하나다.창이 바깥으로 튀어나온 구조이고 지금은 시멘트 기와 지붕을 하고 있다. 대개의 오래된 건물들이 그러하듯 다소 비장하게 남쪽을 향해 서있다. ◆ 영주동 근대한옥(등록문화재 제720-3호)관사골로 올라가는 길 왼쪽 조금 낮은 곳에 '영주동 근대한옥'이 있다.작은 공터에는 채소가 가득한 텃밭이 있고 그 앞으로 골기와 집이 한 채 보이므로 쉽게 찾을 수 있다. 문화재청 자료에 따르면, 명나라 황제가 어머니의 병을 고쳐준 의원 이석간에게 보답으로 99칸 본채와 별채 여러 채를 지어주었다고 한다.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별채인데, 그마저도 1920년에 신축한 거라고 한다. 팔작지붕에 정면 7칸, 측면 6칸의 규모이며 현재의 상태로 남아있다. 옛 한옥의 전형을 보여주는 격자무늬의 문들이 보인다. ◆영주 영광이발관(등록문화재 제720-4호)풍국정미소를 나와 조금 걸으면 광복로 남쪽도로변에 보인다. 1930년대부터 ‘국제이발관’으로 영업을 시작하여 ‘시온이발관’으로 바뀌었다가 ‘영광이발관’에 이르는 80여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1970년경 현재의 이발관을 운영하는 사람이 인수하여 지금의 이름으로 영업 하고 있다. 서민들의 일상 생활역사의 흔적을 보여주는 곳이다. 1950년대 근대산업시기에 건축된 슬레이트 목조구조의 건축물이다. 영주에서 80년 동안 지속된 장인의 이발관 역사의 흔적을 보여주는 사례로 업계의 변화와 특성, 기술을 간직하고 있다. 사라져가는 ‘이발관’의 생활사적 가치가 높은 근대유산이다. 이곳에서는 여전히 비누 거품 솔과 가죽 끈에 면도칼을 갈고, 추억의 비누향기가 나는 곳이다. ◆영주 제일교회(등록문화재 제720-6호)문화재청 등록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영주 제일교회는 1907년 정석주 집에서 기도모임으로 시작되었고, 1909년 4월 초가 3칸을 매입하여 교회를 설립하고 경북노회에 가입하였다고 한다. 2007년에 이미 창립 100주년이 됐다. 1938년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목사와 장로‧전도사들이 구금 또는 옥고를 치렀다. 한국전쟁 중에 소실되었다가 신도들의 노역봉사로 1958년 7월 준공된 역사를 지니고 있다.영주지역에서는 유일한 서양의 고딕식 건축양식이 보이는 절충형의 예배당 근대건축물이다. 영주시의 근현대사에서 시민이자 신도들인 지역 주민들의 삶과 역사적 흔적이 남아있어 전승 보전해야 할 문화유산으로 가치가 있다고 문화재청은 보았다. 이렇게 해서 선과 면 단위로 지정된 등록문화재를 차례로 둘러보았다.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다지만, 주민들은 지역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일제의 잔재를 보존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과 역사적으로 지켜야할 우리의 역사라는 주장이 엇갈린다. 학계에서는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적산가옥을 보존해야 한다고 본다.일제가 남긴 오욕의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교훈의 대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적 비극이 담긴 장소를 찾아 반성하고, 교훈을 얻는 여행을 뜻하는 ‘다크 투어리즘’도 있다.서울 서대문형무소나 나치독일이 남긴 흔적을 오히려 되살린 사례이다. 근대 유산은 자랑스럽든 아니든 우리 근·현대사의 증거다.그리고 이는 우리의 삶의 일부였다.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공간의 의미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세계는 커지고 우리 시야는 더 넓어질 수 있을 것이다.그 오랜 공간에는 만남이나 또는 헤어짐, 수많은 이야기 들이 있었을 것이다. 아픔의 시간을 딛고 지금 우리는 얼마만큼 성장해 있는가. 시간이 멈춘 거리, 이 6월에는 그리움과 함께 걷는다. (글·사진= 박순국 언론인) 문정화 기자 moonjh@idaegu.com

소설가 김훈 “안동은 엄청난 스토리가 있는데 텔링을 하지 못한다”

소설가이자 수필가인 김훈 작가는 지난 1일 “안동은 엄청난 스토리가 있는데 텔링(telling)을 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김 작가는 이날 안동 하회마을 만송정에서 열린 제1회 백두대간 인문캠프” 초청 강연(주제-비스듬히 외면한 존재의 품격)에서 “하회마을은 5~6년 만에 왔다. 양반과 상민, 유교와 무속, 선비와 하인 등이 공존하는 곳인데 스토리텔링에서 좀 아쉽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이어 “답답하다. 텔러(teller)를 길러야 한다. 배우나 이야기꾼이 캐릭터로 만들어 사람들에게 얘기해 줘야 한다. 갑질, 흙수저, 금수저, 양극화, 국회 욕지거리 등을 하회탈 놀이에 넣어서 하면 얼마나 재미있겠느냐”고 덧붙였다. 이어 그와의 대담에 나선 이철우 경북도지사가 안동의 스토리 텔링에 대한 조언을 구하자 김 작가는 “도지사는 정책만 세우고 재능있는 젊은이들을 발굴해야 한다”면서 “우리 같은 세대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우리가 하면 망친다. 젊은이들이 스스로 얘기하도록 하면 저절로 텔링이 될 것”이라고 답했다. 경북도와 안동시, 경북관광공사 등이 후원하고 전국에서 온 팬 700여 명이 참석한 이날 강연에서 김 작가는 퇴계 이황, 서애 류성룡, 석주 이상룡 선생 등 안동 유림의 리더들이 확립한 전통의 힘으로 우리 사회 윤리와 정신을 바르게 지켜왔음을 강조했다. 김 작가는 “우리가 과연 전통과 물려받은 것의 힘으로 우리 현실을 개혁, 개선해 나갈 수 있을까? 라는 것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지만 하회마을이 던지는 무서운 질문”이라며 “전통의 힘, 보수의 힘, 그 안에도 미래를 열어젖힐 힘의 바탕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는 근대화 과정에서 그 전통적인 힘의 바탕을 근대화 동력에 연결하는 일에 매우 소홀했거나 등한시했거나 접목하지 못해 혼란 속으로 빠지게 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 작가는 또 “우리 사회의 특징은 악다구니, 쌍소리, 욕지거리”라며 “이걸로 날을 지고 새고 몇 년째 난리 치고 있고 하루도 안 빼고 매일 욕을 한다”고 현 세태를 비판했다. 이어 “남의 고통을 이해하는 능력과 감수성이 너무 없다”고 현 세태를 지적하면서 “대신 쓸데없는 소리를 너무 많이 하는 아주 어수선하고 천박한 세상이 돼 버렸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서로 뜨려고 하는 세상이 됐고 뜬다는 말이 아주 천박하고 더럽다”면서 “이렇게 오래된 마을(하회마을)이 수백 년간 함양해온 덕성과 가치를 상실, 현대에 어떻게 접목할지에 대해 아무 대책이 없다”고 했다. 해법으로는 “말을 바르게 하고 말을 너무 빨리하지 말고, 남의 말을 듣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인간이 추구해야 할 목표는 친절”이라며 “내가 죽으면 글 잘 쓰고 나발이고 필요 없이, 그냥 참 상냥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다고 기억해줬으면 좋겠다”며 강연을 마무리했다. 문정화 기자 moonjh@idaegu.com

신선이 내려와 노닐었다는 절경, 자연이 화공되어 그린 한 폭의 ‘진경산수화’일까

맑은 물에 의해 생겨난 긴 모래톱이 수려한 풍경과 함께 이어진다. 내성천은 소백산맥의 남쪽 기슭 봉화군에서 발원해 예천분지를 거쳐 낙동강 상류로 흘러든다. 예천의 내성천변에는 뛰어난 경관 덕에 유서 깊은 문화유적도 많다. ‘예천 선몽대 일원’은 2006년 국가지정 문화재인 명승 제19호로 지정됐다. 선몽대는 우암산 능선이 내성천으로 내려앉는 벼랑 끝에 자리한다. 앞으로는 내성천의 맑은 물이 흐르고 드넓은 백사장이 펼쳐져 있어 진경산수화 속에 들어가 있는 느낌이다. 주변에는 우거진 소나무 숲이 펼쳐진다. 굵은 노송의 줄기와 거북 등 같은 껍질들이 이곳에서 살아온 나무들의 시간을 가늠케 한다. 솔숲과 내성천의 흐름과 백사장, 그리고 단애 위에 서 있는 옛 건물이 어우러져 빼어난 풍광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을 한데 묶어 ‘예천 선몽대 일원’이라는 이름으로 명승에 지정된 것이다. 문화유적과 더불어 주위 환경이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는 곳을 지칭하는 국가지정 문화재이다. 명승은 국보, 보물, 사적 등과 같이 문화재보호법을 근거로 문화재청이 지정하여 발표한다. 지친 현대인들을 위해 향유할 수 있는 우리의 문화유산으로서 휴식과 위안의 장소를 제공한다. 그 안에 있는 나무와 풀 한 포기, 작은 바위 하나에도 우리의 역사가 곳곳에 서려 있다. ◆소나무 숲백송리 마을 옆으로 이어진 시원한 가로수 터널을 지나면, 문이 활짝 열리듯 내성천 물길과 십 리에 이른다는 백사장과 빼어난 소나무 숲이 펼쳐진다. 송림 사이에는 커다란 돌비석 두 개가 세워져 있다. 하나는 ‘선대동천(仙臺洞天)’이라 새겨진 비다. ‘선몽대가 산천에 둘러싸여 훌륭한 경치를 이루고 있다’는 의미다. 그곳에서부터 신선의 땅이 시작된다는 설명으로 느껴진다. 또 하나는 ‘산하호대(山河好大)’로 ‘산이 좋고 하천은 크고 길다’라는 의미다. 용이 승천하듯 힘 있는 몸짓으로 비틀어 오르는 거목소나무 숲은 신선이 내려와 놀았음직한 풍경이다. 송림이 끝날 무렵 우암의 기념비도 보인다. 선몽대 숲은 백송리 마을에서 내성천으로 연결되는 수구를 막아 수해를 방지한다. 매서운 겨울바람을 차단함으로써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조성했을 보호림 또는 풍수상 비보림(裨補林)으로 보인다. 소나무 그늘 아래 돗자리를 펴고 눕는다면, 신선이 꿈속에 나타날지도 모른다. 시간이 멈춘 듯 느리게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휴식하기 좋은 곳이다. 사각사각 밟히는 모래 소리가 기분을 좋게 한다. 숲을 지나 모래밭이 거의 끝나는 곳에 선몽대가 위치한다. 자연 암반을 있는 그대로 쪼아 만든 돌계단이 선몽대 입구에 있다. 신선만이 딛고 오를 수 있는 계단이라는 의미로 느껴진다. 선몽대는 1563년(명종18)에 우암(遇岩) 이열도(李閱道)가 창건했으며, 그는 퇴계 이황의 종손(從孫)이며, 문하생이기도 하다. 선몽대는 우암이 그 자리에서 신선이 노니는 꿈을 꾸었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그는 선조 9년 별시에 문과 급제해 승문원정자, 사헌부감찰, 형조정랑, 경산현감 등을 지냈다. 관리로서 청렴 강직했던 그는, 당시 관찰사의 그릇된 처사를 대하고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고향인 호명면 백송리로 돌아와 선몽대를 지었다. 우암산 북서쪽 벼랑 위에 내성천을 바라보며 정면3칸, 측면2칸 규모의 팔작지붕으로 세워진 정자다. 기단을 축조하지 않고 천연의 암반을 이용해 필요한 곳에만 초석을 놓았다. 1623년에 큰비로 무너져 1671년에 중건하는 등 이후 몇 차례의 보수를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저명인사들의 친필 시그곳에는 당시의 저명인사가 많이 모여 시를 지어 읊으며 선몽대의 창건을 축하했다고 한다. 이황은 선몽대(仙夢臺)라는 현판 글씨 석 자를 친필로 써 주었다. 현재 퇴계선생의 현판은 안동에 있는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문화박물관 전시실에 소장돼 있다. 전시 설명문에는 ‘글씨에도 선계에 노니는 듯한 초탈적 감성이 미묘하게 묻어난다. 송설체의 유려한 필법 위에 왕희지의 굳세고 단정한 이른바 ‘퇴필’의 전형적인 서풍’이라고 적혀 있다. 퇴계는 ‘선몽대에 지어 보냄(寄題仙夢臺)’ 이라며 친필로 시도 써주었다. 노송 속 높은 누대 푸른 하늘에 꽂혀있고(松老高臺揷翠虛)/ 강변의 흰 모래 푸른 절벽 그려내기 어렵노라(白沙靑壁畵難如)/ 내 지금 밤마다 선몽에 의지해 구경하니(吾今夜夜憑仙夢)/ 예전에 기리지 못하였음을 한탄하지 않노라(莫恨前時趁賞疎). 그 후 많은 선비, 문인들이 이곳에 모여 내성천을 굽어보며 시를 읊었다. 이열도는 퇴계 문하에서 당대의 석학들과 수학했다. 조정에 진출해 벼슬살이했던 인물이기에 약포 정탁, 서애 류성룡, 청음 김상헌, 한음 이덕형, 학봉 김성일 등 당대 유학자들이 친필시를 남겼는데, 목판에 새겨져 지금까지 전해 오고 있다. 현재 걸려있는 편액들은 모두 한국국학진흥원에 있는 원본의 복제본이라고 한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의 강화를 반대한 척화파의 거두 청음 김상헌도 훗날 선몽대에 올라 시를 남겼다. 모래는 깨끗하고 냇물 맑아서 텅 빈 것 같으니 / 옥산 옥구슬 가득한 정원에 비교함이 어떠할까…. (중략) 1599년 가을에 참봉 조여익이 향시에 합격한 뒤 약포 정탁을 찾아왔다. 조여익은 이열도의 사위다. 그는 선몽대를 이야기하며 이황이 지은 칠언절구를 보여준다. 약포는 옷깃을 여미고 세 번이나 되풀이하여 읽으면서 경탄하고 느낀 바가 있어 절구를 차운해 시를 지었다. 그중 몇 구절을 보면,남긴 시를 되새겨 외우니 배알하는 듯하네/ 꿈을 깬 후 몇 번이나 선몽대 위에 누워보니/ 바위 가의 높은 대가 온 허공을 끌어당기고/ 적송은 구불구불 늙은 교룡 같구나/ 백 년의 세월이 눈길 돌리듯 짧은데/ 늘그막에야 속세의 꿈이 헛됨을 깨달았으니/ 선몽대의 한바탕 꿈 어떠한지 묻노라. (중략) 다산 정약용도 어릴 적에 당시 예천군수였던 부친 정재원을 따라 왔다가 ‘선몽대기’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아버지를 따라 선몽대에 올랐다. 벽 위에 여러 시가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중의 하나는 관찰사를 지내신 나의 선대 할아버지께서 일찍이 지으신 것이었다.아버지께서 손으로 먼지를 털어내고 나에게 읽으라 하고서 말씀하시기를, ‘일찍이 영남에 관찰사로 왔을 때 이 누대에 오르신 것이다.공이 지금부터 2백여 년 전에 사셨던 분인데, 나와 네가 또 이곳에 올라서 즐기니, 어찌 기이한 일이 아니겠느냐’며 기(記)를 쓰라고 하셨다”. 다산의 3대가 시간은 달리했으나, 같은 공간에서 시를 지어 남겼다. 당시 인근 지역의 선비나 관리들은 자주 선몽대에 올라 시회를 열거나 대화를 나누는 사교의 공간으로 활용했다. 타 지역의 고급 손님들을 초대해 먼 곳의 정보를 듣는다. 통신 미디어가 발전되지 않았던 그 옛날 이곳에서 사교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기도 했을 것이다. 좋은 경치를 보면서 정신을 맑게 하고 세심하는 공간이기도 했지만, 지방 관리들에게는 선정을 베풀기 위해 꼭 필요한 장소였다. 선비들은 그런 곳에 별채를 짓고 그곳을 오가며 자연과 인간의 합일을 위한 수양에 노력했을 것이다. ◆내성천내성천은 선몽대 일원을 아름다운 비경으로 만든 첫 번째 요소이다. 내성천의 푸른 물은 상류에서 구불구불 감돌아 흘러온 후 선몽대 앞에서 물길을 따라 비단결처럼 여울져 내려간다. 한때는 천변의 백사장이 반짝거린다고 백금리(白金里)라고도 했다. 일부 환경전문가 중에서는 내성천이 육지화 되고 있는 영향으로 백사장에 나타나는 풀밭이 우려된다는 소리도 나온다. 숲의 전체 모습을 촬영하려면 강 건너편에서 보는 게 제격이란 생각에 신발 벗고 바지를 걷은 채 얕은 강물 속으로 들어갔다. 5월이긴 하나 아직은 서늘한 강물의 기운이 종아리를 감돌며 스친다. 고개 들어 바라보니 펼쳐진 소나무 숲도 내성천 물에 비친 우암산 선몽대의 반영도 둥실 뜬 흰 구름도 모두가 아름다운 정경이다. 손을 담가 만지는 물은 흘러가는 마지막 물이자 다가오는 첫 물이다. 지금 이 시각이 바로 그렇다. (글·사진= 박순국 언론인) 문정화 기자 moonjh@idaegu.com

야트막한 언덕 위 외로이 선 ‘쾌재정’ 부끄러움 아는 선비 모습 고스란히 닮아

이른바 패스트트랙 문제로 당파싸움이 한창인 날 쾌재정을 찾았다. 여의도의 풍경은 쇠뭉치를 휘두르는 난장판이었지만, 한적한 농촌은 딴 세상처럼 평화로웠다. 모내기 철 가까운 봄날이어서 들녘은 생명의 온기로 부풀었고, 산새들은 짝을 지어 보금자리를 찾고 있었다. 자연의 여여(如如) 함에 비추어 보건대, 세속의 민낯은 참혹한 것이었다. 참혹을 넘어 민망한 것이었다. 오만과 독선과 탐욕 때문일 것이다. 권력의지의 주된 에너지원이 오만과 독선과 탐욕일 때 나쁜 정치판이 성시를 이루는 법, 작금의 여의도 살풍경이 그 대표적인 본보기일 터이다. 논밭을 일구는 농부에게, 노래하는 새들에게, 이 맑은 봄날에게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러움을 모르면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지... 마음속에 되뇌며 차를 달렸다. 내 차의 내비게이션은 이곳이 내가 찾는 그곳이라며 상주시 이안면 가장리 농로(農路)에 내리라 한다. 텅 빈 들녘 경운기 곁에 내리라 하니 황당한 일이었다. 주변에 ‘쾌재정’은 보이지 않았다. 도무지 유적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곳이었다. 밭갈이하는 농부도 그런 곳은 모른다 했고, 안내 표지판도 찾을 수 없었다. 차를 되돌려 수소문을 나섰다. 문 잠긴 경찰 지구대를 지나, 주민잔치 한마당이 열리고 있는 이안면 사무소를 거쳐, 철길 밑 굴다리를 지나, 다시 내비게이션이 데려다준 곳 또한 그곳, 그 자리였다. 교통경찰이 귀띔해준 야트막한 동산이 시치미를 떼고 나를 맞았다. 산이라기보다는 언덕에 가까운 저 숲속에 쾌재정이 있을 것이었지만, 쾌재정 입구는 보이지 않았다. 농가의 텃밭이 앞길을 가로막고, 발길 끊긴 지 오래인 듯 우거진 잡초가 뒷길을 지우고 있었다. 이끼 낀 너럭바위를 지나 흐린 옛길의 흔적을 더듬어 마침내 ‘쾌재정’(경상북도 문화재자료 581호)에 이르렀다. 위리안치된 선비처럼 남루한 모습이었다. 냇물이 동쪽으로 흘러 무지개를 드리운 것 같고, 산이 냇물에 임하여 마치 누에의 머리같이 된 곳에 정자가 있어 나는 듯하다. 이름하여 ‘쾌재정’이라. ‘동쪽으로 학가산, 서쪽으로 속리산을 바라보고, 남쪽으로 갑장산을, 북쪽으로 대승산을 바라본다. 강산이 아름다워 비단결 같도다. 그 주인은 누구인고, 채기지(蔡耆之)로다’와 같이 쾌재정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기문(記文)은 옛 시인의 허사였다. 쾌재정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며, 문장가, 중종반정공신으로 인천군에 봉군되었던 난재 채수(1449-1515) 선생이 낙향하여 지은 정자이다. 그는 이곳에서 최초의 국문소설로 알려진 (설공천전)을 쓴다. 저승을 다녀온 설공찬(薛公璨)이 당시의 정치인들에 대한 염라대왕의 평을 이야기로 만든 (설공천전)은 허균의 (홍길동전) 보다 100년 앞서 쓰인 패관소설이다. 훈구대신과 신진사림의 갈등, 요즘 말로 하자면 보수 우파와 진보 좌파의 세력다툼으로 영일이 없었던 조선 중종 조의 정치적 상황이 그 배경이다. 주인공 설공찬이 들려주는 저승 이야기는 이렇다. 저승에는 남녀차별이 없어 여성이라도 능력만 있으면 높은 벼슬을 할 수 있다는 것. 이승에서 아무리 큰 권력이 있었어도 저승에서는 그 사람의 행적에 따라 벌을 받는데, 그 예로 당 태종은 사람을 많아 죽여서 지옥에 있다는 것. 아무리 임금이라도 반역을 저질렀으면 지옥에 간다는 이야기이다. 당시의 풍속에 비추어보면 가히 파격적인 내용이었다. 특히 반역에 대한 부분은 중종(中宗)이 반정(反正)으로 연산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지 얼마 안 되는 민감한 시점이었기 때문에 중종과 권신(權臣)들의 눈에 여간 거슬리는 것이 아니었다. 당연히 조정은 (설공천전) 필화사건으로 들끓었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는 아옹다옹으로 날밤을 새우나보다. 중종 3년(1508) 9월의 일이었다. “채수(蔡壽)가 (설공찬전(薛公瓚傳))을 지었는데, 내용이 모두 화복(禍福)이 윤회(輪廻)한다는 논설로, 매우 요망(妖妄)한 것이며, 중외(中外)가 현혹되어 믿고서 문자(文字)로 옮기거나 언어(諺語)로 번역하여 전파함으로써 민중을 미혹시킵니다. 부(府)에서 마땅히 행이(行移) 하여 거두어 드리겠으나, 혹 거두어들이지 않거나 뒤에 발견되면, 죄로 다스려야 합니다” 라고 사헌부가 임금에게 아뢰자, 임금은 “(설공찬전)은 내용이 요망하고 허황하니 금지함이 옳으나, 법을 따로 세울 필요는 없다. 나머지는 윤허하지 않는다” 고 하였다. 그럼에도 채수를 교수(絞首)해야 한다는 탄핵 상소가 계속되자, 그가 지은 (설공찬전)이 괴이하고 허탄한 말을 꾸며서 문자로 나타낸 것이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믿어 혹하게 하므로 ‘부정한 도로 정도를 어지럽히고 인민을 선동하여 미혹케 한 율(律)’에 의해 사헌부가 교수(絞首)로써 조율했는데, 파직만을 명한다. 이와 같이 임금은 거듭 극형이 아닌 파직을 명한다. 그러나 요망한 사설로 민심을 어지럽힌 채수를 교수형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조정의 여론은 끊이지 않았다. 그러자 9월20일 조강(朝講)에서 영사(領事) 김수동(金壽童)이 “채수(蔡壽)가 만약 스스로 요망한 말을 만들어 인심을 선동시켰다면 사형으로 단죄함이 가하지만, 다만 기양(技癢)의 시킨 바가 되어 보고 들은 대로 망령되이 지었으니, 채수를 교수로 단죄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형벌(刑罰)과 상(賞)은 중(中)을 얻도록 힘써야 합니다. 만약 이 사람이 죽어야 한다면, (태평광기), (전등신화) 같은 유(類)를 지은 자도 모조리 베어야 하겠습니까?” 라고 채수를 두둔한다. 임금은 “(설공찬전)은 윤회화복의 설(說)을 만들어 어리석은 백성을 미혹케 하였으니, 채수에게 죄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교수함은 과하므로 참작해서 파직한 것이다”라는 설명으로 필화사건을 매듭짓는다. 배타적 이념과 진영의 치킨게임으로 ‘궤멸’, ‘청산’과 등과 같은 섬뜩한 말들이 흉흉한 작금 사정에 비추어 볼 때, 어느 한 쪽에 휘둘리지 않는 임금의 자세는 돋보이는 바 있다. 중종실록에 실려 있는 선생의 (졸기·卒記)는 선생의 사람됨을 이렇게 적고 있다. 채수는 사람됨이 영리하며 글을 널리 보고 기억을 잘하여 젊어서부터 문예(文藝)로 이름을 드러냈고, 성종조에서는 폐비의 과실을 극진히 간하여 간쟁하는 신하의 기풍이 있었다. 그러나 성품이 조급하며 허망하여서 하는 일이 거칠고 경솔하였으며, 늘 시주(詩酒)와 음률(音律)을 가지고 스스로 즐겼다. 일찍이 설공찬전(薛公瓚傳)을 지었는데, 떳떳하지 않은 말이 많기 때문에 사림(士林)이 부족하게 여겼다. 사림의 평가가 어떠하든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선생은 최소한 부끄러움을 아는 선비였다는 사실이다.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가담한 공로로 인천군(仁川君)에 봉군되는 과정과 경위가 그것을 말해준다. 따르지 않을 때는 목을 베어 오라는 엄명과 함께 거사 주도한 박원종은 수하를 시켜 선생을 반정에 동참시키게 한다. 저간 사정을 알게 된 선생의 사위 김감(金勘)은 ‘장인이 올 리가 없다’는 생각에 선생을 취하도록 술을 권한다. 만취한 상태로 부축을 받아 궐기 장소에 인도된 선생은 영문도 모르는 채 반정에 참여한 공신이 되고, 분의정국공신(奮義靖國功臣) 3등의 녹훈을 받게 된다. 술기운에 떠밀려 얻게 된 공신 책봉이 선생에게는 견디기 힘든 부끄러움이었다. 염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부끄러움이 선생의 낙향을 부추긴다. 여의도 사람들이 새겨야 할 대목이다. 정쟁 없는 시절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쟁의 앞뒤 맥락에는 부끄러움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 염치가 있고 없고의 차이로 나뉘는 서로 다른 클래스가 있다. 채수 선생에게서 보듯, 부끄러움을 아는 자의 부끄러움은 후세를 경계(警戒)하는 (설공찬전)을 낳고, 패스트트랙 정국에서 보듯,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의 저 잘난 민낯은 민생파탄의 난장판을 낳는다. 염치 있는 세상이 보고 싶은 이유이다. 강현국(시인, 사단법인 녹색문화컨텐츠개발연구원 이사장) 문정화 기자 moonjh@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