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영애의 영화산책…에릭 바르비에 ‘새벽의 약속’

프랑스 공쿠르 문학상을 2번이나 수상한 유일한 작가인 로맹 가리는 자신의 나이 66세 때 권총 자살을 하면서 “로맹 가리와 에밀 아자르는 같은 사람”이라는 유서를 남겼다. 그리고 유서의 끝에 “나는 마침내 나 자신을 완전히 표현했다”고 적었다.1956년, 로맹 가리라는 본명으로 쓴 ‘하늘의 뿌리’로 공쿠르 문학상을 받았으나 나이가 들면서 그는 점차 사람들에게 잊혀져 갔다. 그래서 에밀 아자르란 이름으로 다시 ‘자기 앞의 생’을 발표하여 두 번째 공쿠르 문학상을 수상한다.사람들은 에밀 아자르란 신예 천재 작가가 탄생했다며 환호했다. 로맹 가리는 세상의 편견과 차별에 대한 저항으로 무명 작가의 이름을 선택함으로써 전 세계 문단에 파문을 일으켰다. 그러나 로맹 가리는 태생적으로 불행한 사람이었다. 혼자 남은 어머니는 러시아계 유대인이었던 로맹 가리를 데리고 어릴 적 프랑스 니스로 이주한다. 단지 로맹 가리의 앞날을 위해서였다.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자식의 성공을 위해서 엄청나게 열정적이었던 로맹 가리의 어머니는 폴란드를 떠나 프랑스 니스에 정착한다. 영화 ‘새벽의 약속’이란 제목은 로맹 가리의 자서전인 ‘새벽의 약속’을 영화화한 것으로 그가 어머니의 지원으로 어떻게 위대한 소설가가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극성이라 할 어머니는 로맹 가리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으로 자주 그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넌 위대한 소설가가 될 거야.로맹 가리의 어머니는 우리의 시각으로 봐도 아들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엄청나게 극성인 어머니였다. 사사건건 로맹을 통제하려 드는 그녀는 아마도 그의 영혼마저도 통제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이자 이방인으로 살아가야 했던 로맹에게 어머니의 극성은 힘이 되었다.전쟁터에서 부상을 입어 병원에 입원해 있던 로맹에게 매주 편지가 온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미 3년 전에 죽었다. 그녀는 수많은 편지를 써서 로맹의 이모에게 매주 로맹에게 편지를 보내라고 부탁했던 것이다.로맹 가리가 작가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힘이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작가란 것이 누구의 도움으로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려울 때마다 힘이 되어 주던 어머니는 그가 좌절하지 않고 삶을 견뎌내는 이유가 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행운과 불행이 교차하면서 찾아오는 삶을 혼자서 버티기란 얼마나 힘겨운가.영화를 보면 로맹의 삶은 어머니에게 바쳐지고, 어머니의 삶은 로맹에게 바쳐진 것처럼 보인다. 어머니의 고생을 지켜보면서 화려한 성공을 꿈꾸고, 그러면서 결핍된 사랑으로 끝없이 사랑을 찾아 헤매고, 그러면서도 작가로서의 자유에 대한 갈망으로 끝없이 벗어나고 싶어했던 로맹은 결국 어머니의 바람대로 위대한 소설가가 되었다.그러나 그 어머니의 결핍되고 왜곡된 사랑은 그의 삶마저도 왜곡시켜 그를 권총자살로 이끌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미 삶은 굴절되었고, 순간순간 직선으로 달린다고 생각했던 삶은 어느 순간에 또 굴절되어 그를 비틀거리게 했던 것이다.“로맹 가리와 에밀 아자르는 같은 사람”이라는 유서는 그가 얼마나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어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아프다.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천영애의 영화산책…장예모 감독 ‘5일의 마중’

전쟁과 혁명은 언제나 영웅들의 이야기를 낳지만 그 이야기들이 깊은 울림과 감동을 주지는 못한다. 그저 이야기거리에 불과하다. 그러나 전쟁과 혁명의 뒤안길에서 자기 삶을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이야기가 정작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는 그 삶이 곧 우리의 삶이기도 해서는 아닐까.누군가는 대의를 위한 전쟁을 불사하자고 말하고, 누군가는 세상을 뒤엎을 혁명을 꿈꾸지만 나는 오늘과 다름없는 내일을 꿈꿀 뿐이다. 전쟁과 혁명으로 내가 얻을 것은 없지만 잃을 것은 많다. 그래서 큰 별 일이 없으면 내일도 오늘과 다름없이 이어지길 바라는 것이다.중국의 문화대혁명은 많은 것을 잃게 만들었다. 수천년 동안 이어져 내려오던 중국의 역사와 문화가 부정되고 새 세상을 꿈꾸던 혁명가들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실종되었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것이 혁명일진대 문화대혁명으로 더 나은 세상이 만들어졌는지는 의문이다.이 문화대혁명때 교수였던 루옌스는 유형지로 끌려가고, 펑완위는 남아 딸을 키운다. 춤을 추던 딸은 반동분자를 아버지로 둔 이유로 공연의 주역에서 탈락하는데 어느날 류옌스가 집으로 찾아든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지만 펑은 두려움 때문에 문을 열어주지 못하고, 루옌스는 문 틈으로 쪽지를 하나 남긴다. 그들이 만나기로 한 날, 딸의 고발로 루옌스는 잡혀가고 펑은 기억을 잃어버린다.이후 펑은 그날 루옌스를 위해 문을 열어주지 못한 죄책감에 평생 문을 열어두고 살게 되지만 정작 옌스가 돌아왔을 때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옌스는 펑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편지를 보낸다. 5일에 돌아온다는. 그리고 옌스는 5일에 기차역에서 돌아오는 흉내를 내지만 정작 펑은 그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날마다 옌스를 기다리는 팻말을 든채 역으로 나간다. 펑에게는 매일이 5일인 것이다. 펑의 모든 기억과 삶은 5일에 멈추어 버렸다.펑 역을 맡은 공리와 영화 ‘붉은 수수밭’으로 유명한 장예모 감독이 함께 만든 이 영화는 가족과 사랑에 대한 짙은 멜로 드라마이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기다리지만 정작 그들을 그런 불행으로 끌고 간 것은 혁명이다. 수십년은 기다린 남편이 옆에 있어도 알아보지 못하는 펑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려는 옌스의 기다림은 가슴 아프다 못해 처절하기까지 하다. 매일이 5일이고, 그래서 매일 남편을 마중하기 위해 역으로 가는 아내가 자신을 기억해 주기를 바라며 그녀를 돌보는 한 남자의 삶도 참담하다.세상이 바뀌기를 원하는 많은 사람들이 광장으로 모여든다. 그러나 그들이 꿈꾸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그들은 진정 자신의 소시민적 삶이 희생되더라도 정치적 대의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던질 준비가 되어 있는가. 나는 단언코 그럴 생각이 없다. 혁명은 그들의 일이고 삶은 나의 일이기 때문이다. 언제 소시민들이 혁명의 주역이었던 적이 있었던가. 이 영화는 가족과 소소한 일상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을 위로한다. 그들이 있어 세상은 빛나지 않겠는가.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천영애의 영화산책…이석훈 감독 ‘히말라야’

인간의 죽음이 더 이상의 애도를 필요로 하지 않을 때 인간의 존엄도 더 이상 없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죽음에의 애도에 있다. 인간은 애도를 통해 죽은 사람에 대한 충분한 예의를 갖춘다.계명대학교 개교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떠난 ‘2004 계명대 에베레스트 원정대’는 2004년 5월18일 오전 10시10분, 세계의 지붕 에베레스트 정상(8천850m)에 우뚝 섰다.등반대장 박무택은 이미 1996년에 가셔브롬2(8천35m)에 오른 이후 8천미터급 정상만 무려 다섯 개를 밟은 한국 산악계의 차세대 주자였다.당시 계명대 4학년에 재학중이던 후배 장민 역시 2000년에 시샤팡마(8천27m) 와 초오유(8천201m)에 오른 대단한 경력을 가진 신예였다.휴먼원정대는 2005년 5월, 박무택과 장민,백준호를 찾기 위해 에베레스트를 찾은 원정대다. 감동적이면서도 가슴 아픈 사연을 갖고 있는.이야기는 한 해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베이스 캠프에서 초조하게 두 사람의 소식을 기다리던 저 아래 6천400m 지점의 ABC(전진캠프)는 박무택의 무전기를 통해 전해진 “여기 정상입니다!” 한 마디에 축제 분위기로 바뀌었다. 대구 계명대학교 산악부 OB와 YB는 에베레스트가 떠나가도록 함성을 질렀다.그러나 환희는 오래 가지 않았다. 장민이 탈진하면서 설상가상으로 박무택에게 설맹까지 덮쳐 앞이 보이지 않았다. 박무택은 장민을 먼저 내려 보내고 혼자서 비박을 감행하고 그를 구조하러 올라온 백준호마저도 연락이 두절되었다. 이후 여성산악인 오은선이 사고지점을 향해 출발한 5월20일 새벽, 누군가가 고정 자일에 매달린 채 비스듬히 눕다시피 한 것이 발견되었다. 박무택이었다.우리나라의 대표적 산악인인 엄홍길이 박무택과 장민, 백준호를 찾기 위해 원정대를 꾸렸을 때 참여한 사람은 모두 18명이었다.산악계의 전설인 엄홍길부터 계명대 산악부 동기와 후배, 배테랑 언론인까지 세계 등반역사에서 그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휴먼원정대가 꾸려졌다. 그들은 팔공산과 한라산에서 혹독한 등반 훈련을 거듭했지만 막상 에베레스트에 도착하자 고산병을 앓으면서 시간을 지체할 수밖에 없었다.초모랑마 베이스 캠프에서 박무택이 있는 세컨드 스탭까지 간신히 올라간 그들은 얼음 덩어리로 변한 그를 만났지만 그 험악한 산에서 그를 데려올 수가 없었다. 엄홍길은 네팔 쪽과 티벳 쪽 풍경이 모두 보이는 양지바른 곳에 돌무덤을 쌓을 수밖에 없었다.결국 장민과 백준호는 찾을 수 없었지만 동료를 찾기 위해 죽음을 불사했던 휴먼 원정대의 스토리는 삭막해져가는 인간관계를 돌아보게 만든다.우리는 언제 타인을 위해 목숨을 바치려 한 적이 있었던가. 히말라야 양지바른 언덕의 돌무덤이 오래 잔상으로 남는 영화이다.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천영애의 영화산책…빅터 플래밍 감독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어려운 상황이 생길 때마다 스칼렛이 하던 말은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뜬다”였다. 남북전쟁의 후유증으로 황무지가 된 타라 농장을 재건하고 자신이 사랑하던 애슐리를 못 잊어하던 스칼렛, 그것을 보다 못해 그녀를 떠나는 레트, 그런 사랑 이야기와는 별개로 미국 남북전쟁에서 생존의 문제에 시달리던 스칼렛은 억척스럽게 살아간다.레트가 떠나고 나서야 자신이 레트를 사랑했음을 깨닫는 스칼렛은 농장을 일으켜 세우고 레트를 되찾기 위해 힘들때마다 주문처럼 외친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뜬다.”퓰리처상을 수상한 마거릿 미첼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이 영화는 소설과 마찬가지로 불멸의 영화로 남았다. 원작이 워낙에 탄탄했던 탓도 있지만 비비안 리와 클라크 게이블이라는 배우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한 덕분에 이 영화는 세월이 가도 다시 보고 싶은 명작으로 떠오른 것이다.그러나 스칼렛의 몸종 역할을 맡았던 흑인 배우 헤티 맥대니얼은 1939년 헐리우드에서 있었던 가편집본 시사회에 백인들과 함께 영화를 볼 수 없다는 조지아주의 법률에 따라 참석할 수가 없었다. 클라크 게이블이 이를 부당하게 생각해 행사를 보이콧하려 했으나 맥대니얼의 만류로 결국 그는 행사에 참석했다.1939년에 개봉된 이 영화는 이후 4년 동안 당시 미국 인구의 절반에 해당하는 6천만 장의 티켓이 팔린 것으로 알려졌다. 1947년, 1954년, 1967년 세 차례에 걸쳐 버전을 바꾸면서 재개봉을 했는데 판매 수익이 현재 가치로 산정하면 약 50억 달러에 이른다고 한다.제1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무려 13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고 8개 부문에서 수상을 했는데 이 기록은 이후 영화 ‘벤허’가 11개 부문에서 수상할 때까지 19년 동안 깨어지지 않았다. 또한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최초의 컬러영화이자, 여우 조연상을 수상한 맥대니얼은 최초의 흑인 아카데미 수상자로 기록되었다.그러나 이 영화는 남부의 영화답게 남부 중심주의 시각을 드러냄으로써 노예제를 정당화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흑인 극작가인 칼튼 모스는 “‘국가의 탄생’이 미국 역사와 흑인들에 대한 정면 공격이었다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후면 공격”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복종을 미덕으로 살아가는 노예들의 삶이 순정하게 그려짐으로써 그런 비판을 감당해야 했던 것이다.영화의 도입부에 있는 “그곳은 신사도와 목화밭으로 상징되는 곳이었다. 이 아름다운 지방은 기사도가 살아 있는 마지막 땅으로, 용감한 기사와 우아한 숙녀, 그리고 지주와 노예가 함께 존재하는, 책 속에서나 볼 수 있는, 꿈처럼 기억되는 과거가 오늘로 살아 있는 곳. 문명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는 것일까”라는 자막처럼, 이 영화는 남부의 대농원과 노예제도, 그곳에서 살아가는 백인 지주들의 삶에 대한 그리움이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그러나 스칼렛은 지나간 과거를 되돌아보며 그리움과 회한에 잠기지 않는다. 그녀는 타라의 농장에서 힘을 얻고 떠나간 레트를 되찾기 위한 미래를 그린다. 이미 떠오른 어제의 해는 다시 떠오르지 않고 내일의 해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강인하게 살아가는 스칼렛은 남자들의 도움으로 살아가던 당시의 여성상에 도전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천영애의 영화산책…봉준호 감독 ‘기생충’

인간의 욕망이란 사자가 먹이를 뜯어먹는 것처럼 잔인하다. 그러므로 욕망이 아름다운 경우는 없다. 욕망을 향해 달려드는 인간을 보면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이라는 말이 있지만 어떨 때는 짐승보다 더 교활하다. 그래서 많은 선인들이 욕망을 버리라고 설파하는지도 모른다.이 영화는 보는 내내 관객을 불편하게 한다. 내 속의 욕망이 가감없이 투영되기 때문이다.얼마나 부끄러운가. 평소에는 두꺼운 살갗 속에 감추었던 욕망이 영화에서 드러나기 때문에 부정과 긍정의 심리 속에서 결국 불편해지는 것이다.자신의 틀 속에 갇혀 지내다 보면 이웃을 보기가 어렵다. 끼리끼리 사는 습성 때문에 부자들은 부자들끼리 빈자는 빈자끼리 어울리다보면 상대의 삶을 잊기가 쉽다.우리나라에 저렇게 가난한 사람도 있냐는 질문은 그래서 나온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은 어쩔 수 없다는 어이없는 말도 그래서 나온다.그러나 사람은 그 상황에 처하면 거의 대부분은 그렇게 된다.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영화가 불편하다. 나 역시 그 상황이면 그렇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비가 와서 그런지 미세먼지가 없네요”라는 부유한 집 여주인의 말이 올해의 지독한 장마를 보면서 가끔 떠올랐다. 켜놓은 TV에서는 섬진강이 범람하여 하동을 물바다로 만들어 놓고 있었다.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한 달 넘게 비가 내렸지만 막상 나가보면 물이 없었다. 비는 내릴 때마다 시설이 잘 갖추어진 하수구로 흘러들어 그냥 지루하게 비가 내린다는 느낌뿐이었다.그러나 저지대에 사는 사람들은 그 시간에 집이 떠내려가고 소들이 떠내려가고 물이 마을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사람이 죽고 새끼를 살리기 위해 발버둥치는 짐승들의 이야기가 가십으로 자주 나왔다.그리고 비가 멈추고 그런 뉴스가 TV에 더 이상 나오지 않자 잊혀졌다. 눈에 보이지 않는 먼 곳의 이야기처럼.가난한 동네를 지날 때면 문득문득 그들의 삶이 엿보인다. 나도 한때는 살던 동네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시절을 지나오면서 그런 동네에서 살았다. 그런데 그 동네는 평소에는 잊고 산다. 먼 남의 동네처럼 느껴지는 것이다.그래서 비가 오면 어떤 사람은 미세 먼지가 없다고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집이 물에 잠긴다. 사람 사는 동네에서 일어나는 일이다.기생충은 누구를 일컬음일까.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대로 부유한 사람은 부유한 사람대로 누군가에 기생하며 살아간다.92회 아카데미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장편영화상을 휩쓸면서 화제가 되었던 이 작품은 곧이어 세자르 영화제에서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했다.봉준호라는 이름이 고유명사처럼 불리어질 무렵 안타깝게 코로나 사태가 터지면서 묻히게 되었지만 우리나라 영화사상 기념비적인 작품이 될 것이다. 그러면서 가끔 한 스크린에서 그렇게 동시에 나오던 가난과 부유함의 이중성이 스스로를 부끄럽게 하기도 한다.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천영애의 영화산책…켄 로치 감독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12세기 튜더 왕조의 침략 이래 700년간 반목해 온 영국과 아일랜드, 그 속에서 아일랜드는 독립전쟁과 내전을 겪게 된다. 일본의 지배 아래 있다가 독립을 하면서 내전을 겪게 된 우리나라의 역사와 닮아도 너무 닮았다.의사지망생이었던 동생 데미언이 런던의 병원으로 가기 위해 친구들과 축하잔치를 벌이던 날, 금지되었던 공중집회를 했다며 영국군들이 총칼로 무장해서 주민들을 위협한다.이름을 밝히라는 영국군에게 영어가 아닌 아일랜드 고유 언어인 게일어로 대답한 17세 소년 미하일을 영국군은 잔인하게 죽여 버리고, 그 일이 도화선이 되어 데미언은 영국으로 가지 않고 독립운동을 이끌던 형 테디와 함께 아일랜드 공화국군(IRA)에 가담하게 된다.재미있는 것은 형 테디가 현실에 타협하며 독립운동을 해가는 현실주의자인 반면 동생 데미언은 원칙주의자라는 것이다.500%의 이자를 받은 고리대금업자에게 법원은 부당하게 가져간 이자를 돌려 줄 것을 명령하지만 문제는 그 고리대금업자가 독립운동을 위한 무기구입자금도 지원했다는 것. 이에 테디는 고리대금업자를 두둔하고 나서지만 동생 데미언은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면 영국군과 다를 것이 뭐냐고 형과 대립한다.영국군과의 휴전이 선언되고 아일랜드 자유국이 탄생하지만 반쪽뿐인 독립이다. 얼스터 6주를 포함하는 북아일랜드는 여전히 영국령으로 남게 되고, 남부의 다른 주들도 대영제국 국왕에게 충성해야 한다는 조건이다.그 뉴스는 데미언을 분노하게 하지만 테디는 더 이상 전쟁을 할 수 없다며 후일을 도모하자고 데미언을 설득한다. 그렇게 형과 동생은 갈라서게 되고, 아일랜드에는 내전이 발생한다. 형과 동생이 서로에게 총을 겨누는 상황이 온 것이다.체포된 데미언에게 형은 자신에게 협조하면 살려주겠다고 하지만 데미언은 죽음을 택한다. 죽은 동생의 시신을 끌어안고 통곡하는 테디.테디가 데미언을 총살시키는 명령을 내리는 것을 보면서 누구나 하게 되는 질문이 있다. “조국이 과연 그럴만한 가치가 있을까?”라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신념이 과연 그럴만한 가치가 있을까?”라고 물을 수 있다.물론 답은 없다. 누구도 그에 대한 답을 제시해 줄 수가 없다. 인간은 신념에 따라 사는 경우가 흔하고 보면 그럴 가치가 있을 때가 있고, 없을 때도 있다.생애 두 번이나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던 켄 로치 감독은 스타일보다는 메시지가 더 강하다. 또한 디테일보다는 현실감 있는 담백한 연기를 강조하는 좌파 성향의 감독이다.이 영화는 영국과 아일랜드, 그 애증의 역사를 참회하듯 실상을 고발하는 영화를 찍은 영국인 켄 로치 감독의 뜻에 화답한 아일랜드 배우들이 대거 출연하여 완성했다. 영화를 찍은 켄 로치가 있었기에 출연한 배우들도 있었을 것이다.이 영화를 보면서 자꾸만 우리의 역사, 신념에 따라 흔들리는 소시민적인 우리의 모습이 오버랩 됐다. 나라면? 나라면 형제가 우선이었을 것 같다. 형제이므로.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천영애의 영화산책…스티븐 크보스키 감독 ‘원더’

남들과 다른 얼굴을 가지고 태어나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크리스마스보다는 얼굴을 가릴 수 있는 할로윈을 더 좋아하는 어기는 무려 27번이나 성형수술을 하지만 긍정적인 성격으로 무사히 견뎌낸다.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얼굴이 다른 사람들처럼 되는 건 아니었다. 다만 27번 수술을 하기 전보다 조금씩 좋아졌다는 것 정도. 그러나 생각해보면 얼굴이 다른 사람들처럼 생겨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사람들의 얼굴은 모두 다르다. 사람처럼 생겨야 하는 얼굴이란 게 도대체 어떤 것이겠는가. 우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사람의 얼굴을 떠올려 보면 그들의 얼굴, 가령 눈, 코, 입의 모양은 모두 다르다. 그러니 어기의 얼굴이 남들과 다르다고 해서 그것이 그가 인간 세계에서 외톨이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아니다.그러나 어기는 어릴 때부터 얼굴 때문에 밖에 잘 나가지 못했고, 나갈 때는 항상 얼굴을 가리는 무언가를 쓰고 다녔다. 영화에 나오는 가면이나 헬멧 같은 것들을.어기가 점점 자라면서 더 넓은 세상을 보여 주고 싶었던 엄마는 어기를 학교에 보내기로 결정하지만 남들에게는 당연한 그 일도 그들 가족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다. 어기가 남들과 다른 얼굴로 친구들과 부딪혀야 하는 시작점이기 때문이다.어기처럼 생기면 자살할 거라는 친구의 말은 어기에게 큰 상처가 된다. 늘 가족들의 관심이 어기에게 가 있어 혼자 자라야 했던 어기의 누나도 가족관계를 묻는 친구들에게 외동딸이라고 말할 정도로 내면적인 혼란을 겪는 상태이다. 외동딸이라는 말은 어기를 부정하는 말일 수도 있고, 가족의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누나는 어기를 누구보다도 사랑한다.“외모는 바꿀 수 없어요. 우리의 시선을 바꿔야죠”라는 터쉬만의 말은 그러므로 울림이 크다. 타고난 외모를 어찌 완전히 바꾸겠는가. 다만 어느 시점에 고정되어 있는 우리의 시선을 바꿔야 할 뿐이다.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상처를 입고 절망하는 어기에게 하는 엄마의 말이 재미있다. “돋보이는 것들은 원래 잘 섞이지 못해.”그러니까 어기가 친구들과 잘 섞이지 못하는 것은 어기의 얼굴 때문이 아니라 어기가 그들 사이에서 돋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시선을 다르게 하면 이렇게 볼 수도 있는 것이다.외모가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을 받아야 하는 많은 사람들이 떠올려진다. 생각해 보면 그들이 우리와 다르다는 것이 차별을 받아야 할 이유는 아니다. 다만 다를 뿐이다. 그래서 어기가 하는 말은 울림이 크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면 그저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왜 우리는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이 일도 못했을까.헬멧 속에 숨어 있던 아이가 세상 밖으로 나오는 이야기, 그 아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전 세계 800만 관객을 끌어모으며 엄청난 흥행을 했다. 사람들은 대체로 선량하다는 의견에 나는 동의한다. 적어도 이 영화를 보며 감동할 줄 아는 800만의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천영애의 영화산책…올리비에르 나카체, 에릭 토레다노 감독 ‘세라비, 이것이 인생’

한 달이 넘은 지루한 장마는 비를 좋아하는 사람마저도 지치게 만들고,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수해 피해는 비를 구경하는 것조차 미안하게 만든다.무엇이든 지나치면 좋은 것도 좋은 것이 아닌 법, 그러나 비는 사람이 원하는 딱 그만큼만 내릴 리는 만무하고, 늘 모자라거나 넘친다. 그것이 인생이다.“이것이 인생이에요. 당신의 나뭇잎도 갈색으로 변했나요? 그 낙엽은 주위에 버릴 건가요? 이것이 인생입니다.”Chyi Yu가 부르는 C’est La Vie가 먼저 떠오르는 영화이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노래, 바로 이 노래이다. 감성적인 음률이 퍼져나가면 결혼식 파티를 망쳐버리고 낙담하는 맥스의 처진 어깨가 떠오른다.찰리 채플린은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했다.고성에서 벌어지는 결혼식 파티는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거기에는 결혼식 비용을 아끼기 위해 애쓴 신부와 까다로운 신랑, 사고만 치는 직원들, 그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는 맥스가 있다. 그러나 파티 자체를 보면 행복 그 자체이다.누가 그랬던가,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고통의 양은 같다고, 다만 고통의 색이 다를 뿐이라고. 좀 더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인생은 집 현관문을 열었을 때 주인 남자가 팬티만 입고 있는지 아니면 반바지라도 입고 있는지의 차이라고 했다. 잘난 척 해봤자, 고통에 절망해 봤자 인생은 고작 팬티와 반바지의 차이라니 사는 게 좀 힘이 나는가.사람은 성향에 따라 긍정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부정적인 사람이 있다.어떤 것이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시작해 보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부정적인 것부터 먼저 해결하고 종착점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이 있다.나는 긍정적인 것부터, 좋은 것부터 먼저 즐기고 고통스러운 것은 닥치는 대로 해결해 나가며 사는 쪽이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 성향이 그렇다. 그러니 다소 낙천적이고 때론 나태하다.잘 되어 갈건 뻔한데 뭘 걱정해. 그러다가 걱정해야 할 일들이 닥치면 또 해결하다 보면 어찌어찌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한마디로 대책 없는 삶이다. 그러나 뭐 그럭저럭 살아왔다. 그렇게 살지 않는다고 해도 노래 가사처럼 누가 날 걱정하겠는가.운명론자인 나는 한 시간 뒤의 나를 모른다.정해진 운명대로 살아갈 뿐이라는 것 정도만 믿는다. 아무리 운명에서 벗어나려고 해봐도 결국은 정해진 운명의 테두리 안에서 살아갈 것을 믿는다.범신론자이므로 세상 만물에 영혼이 있다고 믿고, 그 세상 만물도 그들의 삶을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가끔 무언가를 내 뜻대로 하려고 발버둥 치는 때도 있지만 한발 물러서서 바라보면 운명의 쳇바퀴를 돌리고 있는 나를 볼 수 있다.그러나 운명을 모르니 나는 그저 내 의지대로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영화에서 대책 없는 사진 작가인 지는 말한다. “일이 잘 풀리지 않고 최악으로 치달릴 때 그때가 최상이라고 생각해”라고.그때는 그것이 최악인 줄 알았지만 지나고 보면 별일 아니었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지는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것을 말한다.아내는 다른 남자를 만나 떠났지만 아내가 떠나기를 기다리는 연인이 있고, 신랑은 불평만 늘어 놓지만 최상이었다고 행복하며 칭찬해 주는 신부가 있고, 고기는 상해 버렸지만 어쨌든 다른 것으로 대체했고, 또 급하게 고기를 구해 주는 지인도 있으니 그만하면 인생은 살만하지 않은가.오랜 장마와 끈끈한 습기와 좋지 않은 소식들로 폭염의 대구가 달아오르고 있다.그러나 뭐 어쩌겠는가. 원래 여름엔 비가 오기 마련이고, 습기가 많기 마련이고 사람이 많으니 좋지 않은 소식도 연달아 들려오지 않겠는가.영화는 말한다. 그것이 인생이라고. 그래서 영화를 보는 동안은 행복해진다.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천영애의 영화산책…벨라 타르 감독 ‘토리노의 말’

1889년 1월 3일, 토리노에서 프리드리히 니체는 외출을 나갔다가 한 마부가 말 때문에 애를 먹고 있는 것을 보았다.마부는 말을 어르고 달래다가 참다못해 채찍을 휘둘렀는데 그걸 본 니체는 말에게 다가가 분노로 미쳐 날뛰는 마부를 진정시키고 말의 목을 끌어안고 흐느꼈다.그걸 본 이웃이 니체를 데리고 갔는데 이틀 동안 침대에 조용히 누워 있던 그는 “어머니, 전 바보였어요”라는 한마디 말을 남기고 10년 동안 침대에 정신 나간 상태로 얌전하게 누워 있었다.살아있던 사람들이 사라지고 나면 그 모든 사람들은 어디에 그 흔적을 남길까, 가끔 묻고 싶은 질문이다.우리보다 앞서 살아갔던 사람들은 모두 어디에 있을까.영화 ‘토리노의 말’ 역시 내내 이 물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 영화는 러닝 타임만 7시간이 넘는 ‘사탄탱고’를 만든 헝가리의 감독인 벨라 타르의 마지막 작품이다.니체가 마지막으로 중얼거린 “어머니, 전 바보였어요”라는 말은 분노로 날뛰는 마부의 채찍을 그대로 견디며 가만히 있는 말을 보면서 자신이 그러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의 말일 것이다.세상이 미쳐 날뛰며 채찍을 휘두를 때 그는 왜 말처럼 가만히 있지 못했을까.영화에서는 황야에 끝없이 폭풍이 불고 오두막집에는 아버지와 딸과 말이 함께 살면서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간다.하루, 이틀, 닷새가 지나고 그들은 소멸할 것이다.성경에서는 첫째 날부터 빛을 만들고, 하늘과 물이 나뉘어지고, 땅과 식물을 만들고, 태양과 달과 별을 만들고, 물고기와 새를 만들고, 마지막으로 짐승과 인간을 만들었다.이렇게 창조된 만물은 끝없이 몰아치는 폭풍 속에서 거대한 흙먼지만이 날릴 뿐이었다. 불모의 대지를 소멸시키듯이.마부의 딸은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이 바람이 불어대는 황야의 오두막에서 셋째 날 성경을 읽기 시작한다.넷째 날은 아침마다 물을 길어오던 우물이 말랐고 말은 더이상 먹이를 일체 먹지 않았다.다섯째 날은 기름이 가득 차 있던 등잔의 불이 꺼지고 폭풍이 멈춘 채 정적이 찾아왔다. 물이 없는 집을 떠났던 마부와 딸은 다시 집으로 돌아와 감자를 먹고 조용히 창가에 앉아 기다린다. 말도 다리를 꺾고 마지막 날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인간은 끝없이 불어대는 바람이 막막하지만 그 지루한 겨울이 지나갈 것을 믿을 수밖에 없고, 우물의 물은 무한으로 퍼올려질 것을 믿을 수밖에 없다.구원을 바라지만 구원은 어디에도 없고 생성과 소멸이라는 냉혹한 자연의 질서만이 존재할 뿐이다.극한의 장면을 연출하기에 가장 적당한 흑백 필름과 롱테이크 미학은 벨라 타르만이 연출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영화미학일 것이다.베를린 영화제에서 은곰상 및 국제비평가협회상을 수상했다.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천영애의 영화산책…하니 아부 아사드 감독 ‘우리 사이의 거대한 산’

사랑이라는 말은 그럴 수 없을 정도로 진부하면서 우리가 살아야 할 강렬한 이유가 되기도 한다.젊은 날의 사랑이 열정 그 자체였다면 나이가 들어가는 지금은 먼 거리를 찾아가야 드디어 사랑이라는 실체가 부옇게 드러나기도 한다.나이가 들어가면 사랑을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할만한 특별한 삶이 잘 다가오지 않기 때문이다.눈이 하얗게 쌓인 험준한 로키 산맥에서 조난당한 벤과 알렉스는 살아남기 위해서 서로를 의지할 수밖에 없는데, 영화를 보는 도중에 가끔 저 둘 중 한 명이 없다면 저들은 살아날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그렇게 3주간 산속에 고립되어 마을을 찾아 내려오면서 둘에게는 사랑이 싹트기 시작하고 서로를 위하는 사랑의 힘은 살아야 한다는 의지를 가지게 한다.흑인이면서 아내와 사별한 의사 벤과 백인이면서 약혼자가 있는 알렉스는 도시로 돌아와 각자의 삶을 살지만 산에서의 강렬한 기억을 잊지 못해 다시 만난다.그들 사이에 존재했던 거대한 산은 무엇이었을까. 영화에서 표면적으로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흑인과 백인이라는 인종의 다름, 알렉스의 약혼자 등이 그들에게 산으로 존재했을 것이다.그러나 3주간이었지만 평생과도 맞먹을 조난자로서의 그 시간은 서로를 믿지 않고 위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특별한 시간이었고 경험이었다.도시로 돌아와 일상적인 도시의 삶을 살아가면서 둘 사이에 존재하는 산을 넘지 않으려고 하지만 어쩌면 그 산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산이었다.흑인과 백인이라는 인종적 다름과 편견, 약혼자가 있다는 것 등은 따지고 보면 사랑을 가로막아야 할 산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그들이 살아남을 것이라는 영화의 결말은 충분히 예상되는 것이었지만 로키 산맥의 광대한 자연 앞에 선 인간의 초라한 모습은 세계가 자기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한번쯤 되돌아 볼 수 있게도 한다.눈 덮인 산에서 인간 둘이 죽어간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산 속의 짐승이 먹이를 구하지 못해 죽어가듯이 인간도 그렇게 얼마든지 죽어갈 수 있는 존재이며, 인간은 산에 있는 그 많은 나무와 동물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세계는 나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만 존재할 뿐이다.깊이 있고 철학적인 주제를 다루는 감독 하니 아부 아사드는 이미 ‘노래로 쏘아 올린 기적’, ‘오마르’ 등으로 인정받는 세계적인 감독의 대열에 합류했으며, 이 영화 역시도 가볍게 보면 가벼운 영화이지만 각각의 장면들에 스치는 의미와 상징들을 생각해 보면 단순히 가벼운 사랑 이야기만은 아니다.인간에 대한 휴머니즘이 영화의 전반을 흘러가다가 둘의 감정이 사랑으로 변하면서 영화는 좀 더 박진감 있게 진행된다. 상대로 인해 내가 살아야 한다는 감정보다 내가 희생되더라도 상대가 살아야 한다는 감정은 훨씬 생을 다채롭고 활기차게 만들기 때문이다.사랑에는 산이 없다. 사랑을 시작하기 전에 수많은 관념과 편견으로 그 사랑이 가로막히기는 하나 사랑이 시작되면 그 모든 편견조차도 생의 의지로 변한다. 에로스가 사랑이면서 열정인 이유이다.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천영애의 영화산책…이재규 감독 ‘역린’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는 말에는 어마어마한 역사와 의미가 숨어 있다. 끝없이 암살 위협에 시달리는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역린이 있는데 이 역린을 둘러싸고 정조를 죽여야 하는 자와 살아남아야 하는 자, 살려야 하는 자의 운명이 엇갈린다.정조는 살아남아 자신의 목을 가져오라는 광백을 죽이고 많은 아이들을 구하는데 그때 광백은 왕에게 죽기 전에 이렇게 말한다. “나 하나 죽인다고 세상이 바뀌겠어?”그러나 정조는 이 말을 가슴에 되새긴다.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진다.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된다.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바뀐다, 온 정성을 다해 하나씩 배워간다면 세상은 바뀐다.’아이들을 가두어 자신의 일에 이용하고 살인을 밥 먹듯이 즐기는 광백 하나 죽인다고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고 사람들은 생각하겠지만 그런 작은 일 하나로 세상은 천천히 바뀌어 가는 것을 우리는 안다. 나비의 몸짓이 태풍이 되는 것과 같다.역린, 왕의 목에 있는 비늘, 이 비늘을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우리는 늘 나 하나 어찌한다고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세상의 그릇된 관습과 제도에 타협하며 살아간다. 사람들은 그것을 타협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타협도 그 무엇도 아닌 잘못된 것과의 동조 내지는 협력일 뿐이다. 그런 삶의 태도는 변하는 세상을 더 더디게 한다.세상을 향해 자신은 뒤주에서 죽어간 사도세자의 아들이라고 선언하는 정조는 그것을 선언하는 순간 역린을 떼어냈다. 그리고 정조는 용서와 처벌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기 시작한다. 용서와 처벌에는 잘 한 일과 잘못된 일의 분별이 전제되어 있다.변하면 생육된다. 변하지 않으면 생육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변화를 너무 두려워하여 변화의 그늘 아래 서지 않으려 한다.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기만한 적은 없었는가. 사도세자의 아들이면서 사도세자의 아들이 아니라고 부정한 적은 없었는가. 많은 사람들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면서 신하의 옷을 입거나 나그네의 옷을 입는다. 그들은 한번도 사도세자의 아들로 살아본 적이 없을 것이다.영화를 보면서 내 몸의 역린을 생각했다. 그 역린으로 나를 부정한 적은 없었을까. 나를 부정하면서 세상을 부정하지는 않았을까.오늘도 세상은 조금씩 변할 것이라고 믿는다. 스스로를 사도세자의 아들이라고 선언할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 조금씩 아주 조금씩 세상은 바뀌어 간다.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천영애의 영화산책…정지우 감독 ‘은교’

성추행이라는 듣기조차 불편한 말이 며칠간 매스컴을 오르내린다.잊어버릴만 하면 다시 수면위로 올라오는 이 말에 모든 여성들은 무심코 자신의 몸을 더듬어 볼 것이다.몸이 대상화되면서 몸은 비로소 수치를 느끼고, 타인의 시선에 극도로 예민해진다. 누가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여성인 나의 ‘몸’을 본다는 느낌은 수치와 모멸감이라는 감정을 불러온다.역사 이래로 여성의 몸은 늘 대상화되어 있었고, 여성들은 그래서 자신의 몸을 감추어야 했다. 자아와 분열된 몸이라는 말이 불러일으키는 그 묘한 느낌을 남성들은 갖고 있을까.영화 ‘은교’는 아름다운 시적인 영화이다. 영화 자체로 보면 그렇다는 말이다.늙어가는 노인의 젊은 여인에 대한 사랑이라니, 아름다운가?사랑이라는 말의 범주를 어디까지 허용해야 하는지는 논외로 치더라도 적어도 영화에서만은 사랑이다.그러나 이것이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추악한 탐욕으로 보일 듯도 하다.미국의 트럼프 대통령도 그렇지만 늙은 남자가 젊은 여자와 함께 사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아직 모르겠다. 늙은 여자가 젊은 남자를 데리고 사는 것이 그 반대의 경우처럼 흔하지 않다는 것을 보면 인간의 욕망은 여자와 남자가 비슷할 것인데 사회적인 시선이 늙은 여자의 욕망을 가두고 있을 것이다.그런데 그 욕망을 남자는 스스럼없이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성 인식이 왜곡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늙은 여자가 젊은 남자의 몸을 보면서 아름답다고 말하기가 쉽지 않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일상적으로 흔히 쓰이는 말이기 때문이다.물론 나이 차를 극복한 사랑은 가능하다. 인간의 감정은 다변하여 사랑에 나이가 무슨 관계이겠는가. 그런데 한쪽은 사랑이라 하지만 한쪽은 성추행이라 느끼는 관계는 사랑이라는 말로 그 관계를 모두 설명하기는 어렵다.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것처럼 사랑이라는 것은 서로 감정의 교감이 이루어져야 가능한데 남자의 일방적인 몸짓을 여자는 사랑이라는 말로 모두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여자인 나는 이런 상황들이 모두 불쾌하게 다가온다. 하나의 일로 그 사람의 삶 전부를 해명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사건으로 불거지는 하나의 일로 그 사람의 의식을 더듬어 볼 수는 있다.영화의 은교는 영화의 은교일 뿐이다.대부분의 젊은 여자들은 늙은 남자의 성적인 표현을 추근거림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불쾌해하고 치욕스러워한다. 그것이 현실이다.여자들이 왜 남자의 추근거림을 당차게 거부하지 못하느냐고?여자들은 그 추근거림조차 위협으로 받아들일 때가 많다. 흔히들 하는 말처럼 남자와 여자는 이렇게 다르다.여자의 추근거림을 남자는 전혀 위협으로 받아들이지 않겠지만 여자는 그렇지 않다. 그러니 소극적으로 그 상황을 회피하는 경우가 많다.만나기만 하면 성적인 음담패설을 늘어놓는 남자가 더러 있다. 남자는 농담이라고 하지만 여자에게는 욕이다.웃자고 하는 말에 더러는 죽자고 덤비는 것이 그런 이유이다. 같이 웃자고 웃어주면 그 음담패설이 끝이 없고 농도도 더 짙어지기 때문에 여자가 갑자기 죽자고 덤비는 이유는 그 농담을 이해 못해서가 아니라 불쾌해서이다.그런데 그게 사건화되면 갑자기 남자는 은교를 사랑했던 노교수같은 태도를 취한다.영화는 영화일 뿐이다.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천영애의 영화산책…‘이타미 준의 바다’

집은 내 삶의 깊은 명제와도 같다. 남이 지은 집에 거주하며 한번도 내 손으로 집을 지어보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을 나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집에 맞추어 산다. 사람마다 삶의 숨결이 다른데 비슷한 집에서 비슷하게 살다보면 각자의 고유한 숨결을 찾을 겨를이 없다.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습성은 이 집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영상으로 보는 제주도의 수, 풍, 석 뮤지엄은 고요 그 자체이다. 제주의 자연과 이들은 구태여 구분되지 않으며 그것이 분명한 건축물임에도 이미 자연 속으로 스며들어 자연이 되었다. 이 뮤지엄을 건축한 이타미 준은 유명한 포도 호텔과 방주 교회를 설계한 재일한국인 건축가이다.영상에서는 이타미 준이 지은 건축물들이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바람처럼 흘러나온다. 건축이 그토록 아름답고 고요하게 자리 잡은 놀라운 풍경이다. 그리고 건축에 대해 조금이라도 생각을 해 본 사람이라면 이타미 준의 수 뮤지엄, 풍 뮤지엄, 석 뮤지엄이 왜 그 자리에 지어졌어야 하는지 의문을 가질 것이다.건축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여기저기를 돌아보면서 깨달은 것은 잘 지은 건축물이란 또 하나의 자연이라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 사람의 손으로 지은 건축물은 자연으로 스며 들어가 나무나 풀처럼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듯이 또 하나의 자연이 된다. 그리고 나무가 수백 년을 가듯이 그 건축물도 수백 년을 갈 것이다.이 다큐에서는 건축의 선의 아름다운 영상이 물결치듯 흘러다니는 화면 위로 양방언의 음악이 또 하나의 건축물처럼 물결친다. 양방언이라면 중국의 차와 티벳의 말을 교환하기 위한 교역로인 차마고도를 영상화한 다큐멘터리 ‘차마고도’의 음악을 만든 재일한국인 2세이다. 그의 음악이 있어 차마고도가 더 아름다운 영상으로 만들어질 수 있었는데 다큐멘터리와 별개로 이 음악은 당시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이 다큐의 음악 역시 양방언이 만들었는데 영상과 음악이 건축물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우리를 사유의 세계로 깊이 끌어들인다.집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경북 영양에 가면 서석지라는 조선시대 3대 민간정원이 있는데 현대인의 시각으로 보면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장소에 있다. 첩첩산중,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을 것 같은 곳에 아름다운 정원을 조성하고 은거하던 사람들은 집도 재산증식의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현대인들은 도저히 지을 수 없는 곳에 집을 지었다. 집은 재산증식의 수단인가, 아니면 우리의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누일 공간인가.차 소리가 시끄럽고 밤이면 폭주족들의 소음으로 창을 닫아야 하는, 거주의 공간으로는 영 못마땅한 곳에 사는 현대인들은 그 서석지의 풍광에 감탄하지만 자신이 거기에 집을 지을 것인가라는 물음에는 고개를 흔든다. 집은 거주의 공간만이 아니라 유효한 투자수단이기도 하기 때문이다.‘이타미 준의 바다’를 보면 잠깐 동안이나마 사람이 거주하는 공간인 건축물이 얼마나 고요하고 적막하게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천영애의 영화산책…짐 자무쉬 감독 ‘천국보다 낯선’

특별한 생은 없다는 것에 내 운명을 건다. 청소부의 생이 특별하지 않듯이 대통령의 생도 특별하지 않다. 특별한 생이 없는 것처럼 특별한 곳도 없다. 시간과 공간이 특별하지 않으니 우리의 생도 그저 그럴 뿐이다. 형식적 실험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짐 자무시의 영화답게 장면이 바뀔 때마다 툭툭 끊어지는 형식과 흑백으로 처리된 화면이 마치 우리의 삶 같다. 짐 자무쉬는 영화의 내용이 아니라 형식을 통해 이야기를 건넨다.우리의 삶은 유장하게 이어지고, 그 이어짐 때문에 어제와 오늘, 내일이 연결될 것 같지만 실은 영화처럼 어제는 어제이고, 오늘은 오늘일 뿐 이것이 내일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지도 모른다. 헝가리에서 뉴욕으로, 클리블랜드로, 플로리다로 이어지는 에바의 삶이 전혀 연관성을 가지지 않는 것처럼. 그러나 또 어찌 이 모든 것이 각각 개별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뉴욕과 클리블랜드, 플로리다는 모두 이어져 있다. 그러므로 영화도 한 장면 장면마다 끊어지면서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한 장면이 끝나고 짧은 암전,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장면, 우리의 삶도 그러했던가. 하나의 사건이 끝나고 잠깐 암전, 그리고 이어지는 다른 사건들, 삶은 이 사건과 사건으로 이어지지만 그것은 연속적이면서도 불연속적이다.뉴욕에서, 눈 내리는 추운 겨울날 클리블랜드에서의, 플로리다로 가는 길에서의 에바의 삶은 하나이면서 하나가 아니다. 그것은 단절되어 있고, 단절된 듯 하면서 이어져 있다. 그 모든 것이 에바의 삶이니 살아 있는 동안 그것은 이어질 것이다. 짐 자무쉬는 영화의 형식을 통해 그것을 강하게 암시한다. 우연하게 다가오는 불행과 행운들, 살아 움직이는 동안의 여러 활동들과 모든 것이 단절된 짧은 시간의 암전, 그리고 바뀌는 화면들, 이것이 생이다.메시지는 분명하다. 끊어지면서 이어지는 것이 우리의 삶이므로 그 순간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것, 모든 순간이 특별한 것 같지만 사실은 전혀 특별하지 않다는 것, 그것이 천국이라도 다르지 않겠지만 우리의 삶은 언제나 낯설고 새롭다는 것이다. 짐 자무쉬의 영화는 내용의 의미에만 집착하는 우리에게 형식을 통해 대화를 건다. 영화의 형식이 특별한 것도 없다고 생각해 왔지만 모든 예술 장르가 그러하듯이 영화 역시 형식으로도 말을 건넨다.현대는 화려한 컬러의 시대이다. 그럼에도 짐 자무쉬는 화려한 컬러를 무시하고 침울한 흑백을 선택한다. 그래서 과거와 미래, 현재는 때로 몽환적이고 비사실적이며 순간적이기도 하다. 우리가 과거를 기억할 때 컬러의 색채감으로 기억하지 않는다. 어렴풋한 안개 같은 시간들, 무어라고 선명하게 말하기 어려운 시간과 공간들은 언제나 흐릿한 흑백으로 기억된다. 그러므로 우리 눈에 보이는 현재의 이 강렬한 컬러들은 실은 착시일지도 모른다. 선명하고 사실적인 현재의 컬러들은 우리의 눈을 교란시키는 환상일지도 모르는 것이다.예술작품에서 형식을 사유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 형식은 내용을 담고 그 내용을 지배한다. 이것이 예술이다. 짐 자무쉬의 영화는 그래서 오래 사유할 문제를 남겨준다.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