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북기협, 광주전남 기협 교류행사

대구·경북과 광주·전남 기자들이 지역 갈등 극복과 지역불균형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논의했다.대구경북기자협회와 광주전남기자협회는 지난 8~9일 광주에서 기자협회 교류행사를 진행했다.두 지역간 민간교류 확대 필요성에 대한 공감을 확대하기 위해 진행된 이날 행사는 김성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재단 이사장이 ‘연대가 시대적 요구이다’라는 주제 발표에 이어 양 협회 집행부들 간의 다양한 주장과 의견 교환 순으로 진행됐다.김 이사장은 “정치권이 ‘디바이드 앤 룰(devide & rule)’로 정권을 유지하는데만 혈안이 되면서 수도권과 지방간의 커진 빈부격차와 인구 감소가 심각한 지방에 대한 해결 방안은 고민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무소속 김경진 의원(광주북갑)은 “영남과 호남에 필요한 것을 한 목소리로 낼 수 있는 의원들이 필요하다. 중앙에 함께 대응했던 이탈리아의 북부 동맹같은 조직이 우리나라에도 나올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김효성 광주전남기자협회장은 “광주대구고속도로의 물동량이 거의 없다. 서로의 공산품과 농산품을 거래하는 ‘비즈니스 관계’로의 발전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이주형 대구경북기자협회장은 “광주와 대구의 기자들이 만난지 2년 째다. 양 지역 기자들이 형제처럼 지내면서 이런 관계를 30년, 50년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힘쓰겠다”고 밝혔다.이주형 기자 leejh@idaegu.com

강효상 의원 “대구를 ‘수구도시’라 칭한 민주당 김영호는 석고대죄하고 의원직을 사퇴하라”

자유한국당 강효상 의원(대구 달서병당협위원장)이 10일 더불어민주당 김영호 의원이 권영진 대구시장을 향해 ‘대구는 수구도시’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탈피시켰다”고 표현한 것과 관련, ‘수구도시’라 칭한 민주당 김영호(의원)는 석고대죄하고 의원직을 사퇴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강 의원은 이날 개인성명을 통해 “오늘 국감장에서 두 귀를 의심할만한 망언이 나왔다”면서 “김영호 의원이 민주당 지지세가 약한 대구를 겨냥해 ‘수구도시’라는, 있지도 않은 악명을 제조해 덮어씌운 것”이라고 주장했다.강 의원은 “일제강점기 국채보상운동과 4.19혁명의 시발점이 된 2·28 민주운동의 발원지인 대구는 대한민국 독립운동과 민주화에 마중물을 부었던 ‘개혁의 본산’”이라며 “그런 대구가 도대체 언제 ‘수구도시’였다는 것인가. 이는 김 의원 스스로가 은연 중에 이미 대구를 수구도시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나, 지역갈등을 조장해 정치적 영달을 꾀하려던 본심이 드러났다고밖에 볼 수 없다”고 규정했다.자신들의 잇속을 위해 국민들을 싸움 붙이고 갈등과 반목을 조장해 나라를 둘로 쪼개놓은 현 더불어민주당의 행태와 똑닮은 모습이라는게 강 의원의 주장이다.강 의원은 “민주당은 즉각 김 의원에 대해 제명을 포함한 징계 조치에 착수해야 할 것”이라며 “만일 민주당이 천하의 파렴치범 조국 일가를 옹호하듯 김 의원의 망언까지 옹호한다면, 이는 300만 대구시민들을 모두 ‘수구’라고 인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경고했다.그러면서 “이에 앞서 망언의 당사자인 김 의원 스스로 대구 시민들에게 석고대죄하고 의원직 사퇴 등의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한다”면서 “그렇지 않으면 대구 시민들의 저항과 심판에 직면하게 될 것임을 강력히 경고한다”고 거듭 목소리를 높였다. 이창재 기자 lcj@idaegu.com

문 대통령, “일제강점기는 한글 지키는 것이 독립운동...민족정신 되새긴다”

문재인 대통령은 9일 한글날을 맞이해 일제강점기 한글을 지켜낸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을 재조명하며 한글에 대한 자긍심을 강조했다.문 대통령은 이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린 메시지에서 “3·1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에 맞는 뜻깊은 한글날”이라며 “573년 전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의 애민정신과 일제강점기 한글을 지켜낸 독립운동가들의 민족정신을 되새긴다”고 말했다.이어 “일제강점기에는 한글을 지키는 것이 곧 독립운동이었다”며 덧붙였다.그는 “주시경 선생과 조선어연구회 선각자들은 고문과 옥살이를 감수하며 한글을 연구했고 끝내 1947년 우리말큰사전을 편찬했다”며 “머리말에 ‘말은 사람의 특징이요, 겨레의 보람이요, 문화의 표상이다’라고 적었다”고 말했다.아울러 김소월의 진달래꽃, 윤동주의 별 헤는 밤, 방정환 선생의 순수아동잡지인 어린이, 항일 언론인 대한매일신보가 순 우리글로 쓰여있음을 강조하면서 “한글만이 우리의 생각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다. 우리 글을 쓰고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삼천리강산을 잊지 않을 수 있었다”며 “국어학자들이 목숨으로 지킨 한글이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마중물이 되었던 것”이라고 강조했다.문 대통령의 이같은 메시지는 한글날을 맞아 일제강점기 한글을 지켜낸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을 재조명함으로써 일본의 부당한 경제 보복성 수출조치에 맞서 다졌던 위기 극복 의지를 다시금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한편 문 대통령은 주시경 선생의 글꼴인 ‘주시경체’를 이용해 한글날 메세지를 전했다.주시경체는 한국교육방송공사가 한글학회로부터 주시경 선생의 국어문법 육필본 원본자료를 받아 제작한 서체다. 이상훈 기자 hksa707@idaegu.com

강효상 의원, 고용보험기금 방만경영 강력 질타! 조속한 후속대책 마련해야!

자유한국당 강효상 의원(대구 달서병 당협위원장,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은 4일 고용노동부 세종정부청사에서 열린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을 상대로 고용보험기금의 방만한 경영에 대해 비판하고 조속한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강 의원이 고용노동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박근혜 정부인 2013년 이후 흑자를 유지하던 고용보험기금 실업급여계정 재정수지가 문재인 정부 들어 지난해 2,750억원 적자 전환된 것으로 나타났다.이에 꾸준히 상승하던 실업급여계정의 적립배율도 0.7배로 떨어지며 적정 수준인 1.5~2.0배에 훨씬 밑도는 것으로 밝혀졌다. 강 의원은 특히 고용노동부가 위탁운용하는 고용보험기금이 선진국 금리연계형 파생금융상품(DLS)에 투자했다가 81%의 손실을 낸 점을 지적하고, 사고원인규명과 사후대책 마련을 촉구했다.고용보험기금은 최근 수천억원대의 손실 사태를 빚고 있는 독일 국채 10년물 금리연계형 파생금융상품(DLS)에 584억원을 투자해 1년새 476억 원의 손실을 냈다.강 의원은 이날 “실업급여계정 재정수지가 적자로 돌아선 것은 정부의 방만한 운영과 함께 소득주도성장의 실패가 주요 원인”라고 지적했다.이어 “금리인하는 전 세계적인 추세임에도 금리연계형 상품에 대규모 투자를 강행한 것은 주간운용사와의 유착까지 의심해볼 수 있는 사안”이라며 “국민 혈세로 조성한 고용보험기금을 아무런 대비책도 없이 투자한 것은 중대한 과실”이라고 강하게 질타했다. 이에 이 장관은 “지난해 고용상황이 좋지 않아 실업급여 지출이 많이 증가했다. 실업급여 보장성 강화와 보험요율 증가 등 안정화 조치를 조속히 마련하겠다”고 답변했다.이어 고용보험기금 투자 손실에 대해서는 “현재 기금 주간운용사인 한국투자증권에 대한 조사를 마치는 대로 위탁운용사에 대한 방안을 강화하겠다”고 말하고, 사과했다. 강 의원은 이에 앞서 세종정부청사 출입구 안에 설치된 ‘일본 불매운동’ 입간판 설치가 적절한지 이 장관에게 질의했다.해당 입간판은 세종시공무원노동조합연합회가 설치한 것으로 “NO아베 독립운동은 못했어도 불매운동은 한다”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이에 강 의원은 “일본의 수출제재와 도쿄올림픽 욱일기 사용 허가 등 최근 일본 정부의 조치는 매우 적절치 않으며 본 위원도 반대했다”면서 “그러나 정부기관 출입구 안에 이런 입간판이 버젓이 설치되어 있는 것은 한국 정부가 일본불매 운동을 주도한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다”며 재고를 촉구했다.이 장관은 이에 이 일본 불매운동 입간판 문제를 관련자들과 논의해보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이창재 기자 lcj@idaegu.com

영양초, 역사와 문화愛 삶을 잇는 남자현 지사의 얼을 찾아서

영양초등학교가 2일 유치원과 1~6학년 전교생 286명을 대상으로 ‘역사와 문화愛 삶을 잇는 남자현 지사의 얼을 찾아서’라는 주제로 역사·문화탐방을 실시했다.이번 행사는 영양군 인재육성장학회의 예산을 지원받아 우리나라의 역사와 전통 문화를 바르게 알고 남자현 애국지사의 발자취를 찾아가는 역사·문화체험의 기회가 됐다.이날 4~6학년 학생들은 경북도 독립운동기념관을 방문해 역사 해설사와 함께 독립관과 의열관을 관람했다. 경북지역에서 활동한 남자현 지사, 김도현 의병장 등 독립운동가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배우는 의미있는 시간이 됐다.‘기억할 역사, 이어갈 3·1정신’ 특별기획전을 관람한 6학년 권모 학생은 “3·1운동 이후 경북에서 100여 차례나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고 소감을 밝혔다.안동국제탈춤공연장을 찾은 학생들은 말레이시아와 러시아의 탈춤 공연을 관람하면서 문화의 차이는 있지만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점을 느꼈다.탈춤 공연 관람후 안동 유교랜드를 방문해 제1관 대동마을부터 제6관 참선비촌에 이르까지 16세기 조선의 선비들 삶과 유교 문화에 대해 직접보고 느끼는 소중한 기회를 가졌다.오원우 교장은 “이번 역사·문화탐방이 우리의 전통 문화와 역사에 대한 이해와 자부심을 갖는 계기가 됐다”며 “마음에 잘 새겨서 당당한 글로벌 리더로 성장하는데 밑거름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황태진 기자 tjhwang@idaegu.com

벼슬 버리고 강산에 살기를 노래하던 가문 외세의 위협 앞에서는 목숨까지 내던져

기차 소리가 한낮의 고요를 깨뜨린다.임청각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石州 李相龍, 1658~1932) 선생의 생가이자 독립운동의 산실이다. 앞에는 시퍼런 낙동강이, 뒤로는 태백산 줄기 영남산(映南山)이 에워싼 배산임수의 명승절경에 자리 잡은 임청각(臨淸閣)은 그러나 잘려나간 마당에 가림막이 둘러쳐져 낙동강 조망을 막아 버렸다. 낙동강은 가까이 영양 일월산에서 발원한 반변천과 합수돼 남해로 긴 물줄기를 이룬다.안동시 법흥동 낙동강변에 위치한 임청각(안동시 임청각길 63)은 뻔한 위치임에도 정작 가는 길은 꽤나 복잡하다. 안동역에서 임청각길을 따라 안동댐으로 가다가 법흥육거리에서 왼쪽으로 중앙선 철길을 따라가면 만난다. ◆임청- 도연명의 귀거래사 시구임청각은 고성이씨 12세 이증의 셋째아들 이명(李洺)이 의흥군수를 내려놓고 중형 이굉(李宏)과 함께 중종 때인 1515년 건립했다. 고려 밀직부사를 지낸 이황을 시조로 하는 고성이씨는 조선 세종 때 좌의정을 지낸 향헌공 이원의 여섯째 아들 참판공 이증(李增)이 관직을 버리고 안동에 이거한 것이 정착의 시작이다.임청각은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동쪽 언덕 위에 올라 길게 휘파람을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노라(登東皐而舒嘯 臨淸流而賦詩)’라는 시구에서 ‘임청’을 따왔다. 당초 99칸이었는데 1940년 중앙선이 개통되면서 강제로 행랑채와 부속채 등이 철거되고 현재 70여 칸만 남았다. 이명의 아들 이굉(李肱)도 벼슬보다는 산수 간의 풍류를 즐기면서 유유자적한다. 백부가 지은 귀래정(歸來亭) 옆에 ‘갈매기와 벗한다’는반구정(伴鷗亭)을 건립한 것이다. 그 아들 이용(李容)도 반구정에서 만년을 보냈으니 삼대가 벼슬을 버리고 은거한 것이다. 3대가 과거급제 아닌 귀거래를 실천했으니 ‘고성이씨삼세유허비’가 세워졌을 만하다.중앙선 철길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고택 임청각에 들어서면 ‘국무령이상룡생가’라는 커다란 문패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단칸 맞배지붕의 문지방 없는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왼쪽 행랑채가 길게 늘어서 있고 바로 눈앞으로 군자정이 보인다.왼쪽 행랑채 쪽으로 들어가서 임청각 정침 마당에 선다. 바닥이 훤히 보이는 우물이 마당 한복판을 차지하고 있다. 임청각이 들어선 자리가 산비탈 청석자리여서인지 깊지 않은 우물물이 맑다.석주 선생의 종손 이창수(55)씨는 “우물 앞에 있는 사랑채는 3명의 정승이 난다는 태실이다. 석주와 철종 때 좌의정이었던 낙파 유후조가 여기서 태어났다. 그러나 이 후 외손들은 이 방에서 해산하지 못하도록 했다”고 말한다. 집 전체 구조는 일(日)자와 월(月)자를 합친 용(用)자 형태로 지어졌다. 해와 달을 지상으로 불러내려 그 정기를 받으려는 염원이 건축에도 담겨 있다. 동쪽으로 담장 샛문을 열고 들어가면 사랑채인 군자정(君子亭)이다. 현판 글씨는 퇴계가 썼다. 별당 건물로 기단 위에 누상주와 주하주로 구성된 군자정 누마루는 사방으로 계자난간을 갖춘 쪽마루를 돌려 지어졌다. 넒은 마루에는 석주 이상룡의 독립운동 과정이 영상물로 볼 수 있도록 했다.군자정에 있는 많은 현판은 임청각의 역사와 임청각을 지켜온 후손들의 정신이 새겨져 있다. 석주가 남긴 거국음(去國吟)과 아들 이준형의 피가 묻은 유서에서부터농암 이현보, 송재 이우, 의병장 고경명, 백사 윤훤, 파서 이집두 등의 시가 걸려 있다.임란 당시 전라도 의병장 제봉 고경명과 고성이씨 16세 이복원은 사돈간이었다. 고경명의 시 ‘제임청각’은 임란 직전 동래부사였던 고경명이 이복원의 회갑연에 참석해 임청각과 주변 풍광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이다.시판에는 고경명의 또 다른 별호 고태헌(高苔軒)이라 서명했다. 고경명은 두 아들과 함께 왜군이 영남에서 호남으로 진격하는 것을 막아내려다 삼부자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고경명의 큰아들 고종후의 아내 고성이씨는 16살인 시동생 고용후를 비롯한 식솔 50여 명을 이끌고 친정 임청각으로 피란 와서 지냈다.“당시에는 영호남 간 혼인으로 교류했으니 지역감정은 없었음을 보여준 것이다”라고 이창수씨는 말한다. 이후 안동에 피란 왔던 고용후가 과거에 급제하고 안동부사가 되어 내려왔다. 그는 피란 당시 은혜를 입었던 고성이씨 문중과 학봉 김성일 일가 등 사람들을 모시고 잔치를 베풀었다고 한다.종손 이창수씨는 임청각에는 ‘삼불차(三不借)’의 전통이 있다고 말한다. 3가지를 빌리지 않았으니 첫째가 자식의 대를 끊이지 않음이요, 둘째는 글을 빌리지 않았고 셋째는 돈을 빌리지 않았다고 자존심을 내건다. 분재기에 따르면 한 때는 노비만도 408명이나 되는 대가였고 한문공부도 나름 했는데 현재는 자신의 아버지(이철증)가 넷째였고 자신은 먼저 돌아가신 종손 (이도증)의 맥을 이었으니 삼불차도 이제 맥이 끊어졌다고 말한다. ◆독립운동의 성지임청각은 보물(182호)이기도 하거니와 근세에 와서 독립운동의 성지로 그 존재가치를 드높였으니 정부가 지정한 현충시설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8·15 경축사에서 “대한민국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상징하는 공간”이라 칭찬한 곳이기도 하다.임청각은 석주 이상룡을 비롯, 아들 이준형과 손자 이병화 등 3대에 걸쳐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명문가다. 석주의 부인 김우락과 동생(이상동·봉희), 조카(이형국·운형·광민), 당숙 이승화, 손부 허은 등 독립운동가로 서훈을 받은 사람만 11명이나 된다. 석주는 구한말 1905년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조직하고 지회장이 돼 협동학교를 설립하고 후진양성과 국민 계몽운동을 벌였다. 1910년 국권을 완전히 빼앗기자 이듬해 전 재산을 처분해 간도로 망명한다.54세의 나이에 아우 봉희와 외아들 준형, 조카 형국과 문형 등을 데리고 압록강을 건넜다. 그는 유학 서적을 접어놓고 가산을 모두 처분해서 가솔들을 데리고 만주로 떠난다. 이때 조상의 신주도 땅에 묻어 버려 임청각 사당에는 위패가 없다. 이런 석주의 정신은 이후 독립운동의 상징이 되고 있다. 만주에서는 길림성 류허현에서 신흥강습소를 열어 교포 자녀의 교육과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12년에는 계몽단체 부민단을 조직해 단장이 됐고 1919년 한족회를 조직해서 자치활동에 힘썼다.서로군정서를 조직해서 독판(督辦)으로 활약했고 1926년 임시정부에서 국무령이 돼 독립운동 최전선에서 싸웠다. 69세 고령으로 독립운동 일선에서 물러선 뒤 1928년 전민족 항일단체 통합에 노력하다가 1932년 5월12일 김림성 서란현에서 순국했다.석주가 순국한 뒤 귀국한 아들 동구 이준형은 일제의 추적에 월곡면 도곡리로 피해 있다 “일제 치하에서 하루를 더 사는 것은 하루의 수치를 더하는 것이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한다.만주로 망명한 석주가 임청각을 매각한 계약금을 갖고 갔다. 그러나 집안에서 계약금을 두 배나 주고 임청각을 되찾았다. 이를 두고 이창수씨는 “계약을 ‘물렸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당시 석주의 가족들은 호적을 만들지 않았고 임청각이 4명의 문중 대표 이름으로 소유권을 명의신탁했다. 석주의 손자 이병화가 명의자 4명을 찾아 해결하려 노력했으나 1명은 끝내 거절했다. 석주의 증손자인 이항증 선생(80·이창수의 숙부)이 최근까지 10여 년간 뛰어다니며 후손들을 상대로 소유권 말소 판결은 얻어냈으나 소유권 등기는 아직 해결되지 않아 공중에 뜬 상태다. 이항증 선생은 “보수적인 선비였던 석주가 종중 씨나락까지 팔진 않았다”며 일부의 임청각 소유권 주장을 일축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법원 소송에 비용도 많이 들었고 몸도 지쳤다”며 임청각의 소유권 문제는 국가에서 관리하는 것도 한 방법임을 시사했다. ◆탑동파임청각과 어깨를 맞대고 있는 탑동고택은 앞마당에 국보 16호 법흥사지 7층 전탑을 두고 있어 탑동파 고택이라 부른다. 신라 시대 법흥사가 있었던 자리라고 한다. 고성이씨 12세 참판공파 이증의 3남 이명이 임청각을 짓고 안동에 정착한 뒤 그의 손자 이복원은 다섯 아들을 둔다. 그 중 셋째 이적 (李適)은 처음 안동읍 남선면 현내리에 분가했다가 다시 임청각 기슭 영남산에 자리를 잡고 정착하니 그가 탑동파의 파조가 된다.탑동고택은 1천여 평 대지에 안채와 사랑채 정자인 북정 등과 잘 꾸며진 연못을 둔 아름다운 고택이다.조선 숙종 때 좌승지로 증직된 이후식이 안채를 건축하고 손자 이원미가 1719년 사랑채와 대청인 영모당을 완성했다. 대청 북쪽에 영조 때인 1775년 진사 이종주가 건립한 북정이 있다.임청각과 탑동종택이 모두 일제때 군부대가 수용되거나 철도 건설 당시 인부들 숙소로 이용되었는가 하면 철도 건설로 철거 훼손돼 옛날의 풍광을 찾을 수 없는 것이 아쉽다. 탑동파 종손 이재익(80)씨는 어릴 때 넓은 백사장에서 멱감고 놀았던 낙동강이 댐 건설과 환경변화로 자취를 찾을 수 없게 됐다고 아쉬워 한다. 2025년이면 중앙선 철로가 현 경북도청 쪽으로 이설되면 임청각과 탑동고택이 옛 풍경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문정화 기자 moonjh@idaegu.com

경주 최부자는 독립운동에서 처럼 육영사업에도 모든 재산을 털어넣었다

최부자집 창고 문서를 통해 밝혀진 내용 중 눈길을 사로잡는 많은 것 중 하나는 최부자의 11대 최현식, 12대 최준은 개인적인 사업가이기에 앞서 독립운동가이자 육영사업자로써 사회 교육자였다는 점이다. 경주최부자민족정신선양회 최창호 이사는 “최부자 7대 남강 최언경 선생은 남강서당을 열어 학문을 지도해 대과에 급제한 최벽을 비롯해 대소과에 급제한 인물을 많이 배출했다”며 “8대 이후에도 경산서당, 집안 사람들이 공부하는 수경당을 운영하며 육영사업에 힘써왔다”고 최부자의 교육에 대해 설명했다. ▲월성여학교 설립최준 선생은 명치 44년(1911년)에 월성초등학교의 전신인 월성여학교를 설립해 개교한다는 초청장을 발송했다. 그해 5월5일자로 사립월성여학교설립자 최준이 오경수 선생 앞으로 5월7일 오전 10시에 개교식을 갖는다는 초청장이 깨끗하게 인쇄된 종이로 나왔다. 이 서류는 월성초등학교 연혁이 소개하는 개교년도를 16년이나 앞당긴 것으로 밝혀져 월성초등학교 연혁을 조정해야 할 판이다. ▲대구대학교 설립독립운동가이자 사회사업가로 활동했던 문파 최준 선생에 대한 기록들은 많이 알려지고 있지만 최부자집 창고에서 나온 서책들은 육영사업 부분에 대해서는 그의 활동에 비해 충분하지 않은 편이다. 최준 선생은 1908년 설립된 교남교육회에 가입하고, 대한협회 경주지회를 설립하면서 교육적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이어 1910년 경주에 간이학교를 설립해 학교 운영경비를 부담했다. 그는 1920년 동아일보 창간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1930년 동경통지 편찬 주간으로 민족문화의 육성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또 1922년 김성수와 민립대학 설립운동에 참여해 1921년 중앙학교의 이사로 재단운영에 참여했다. 또 1922년부터 보성학교를 후원하다가 1932년 보성전문학교 도서관 건립에 참여해 기부금을 출연했다. 1920년에는 경주지역의 고적을 조사해 보존하고 전시하는 경주고적보존회 이사장을 맡았다. 최준이 최남선, 정인보 등의 편집자문을 받아 동경잡기를 수정 보완해 1930년부터 착수해 1933년 동경통지 14권 7책을 펴냈다. 이러한 활발한 문화운동을 전개하다 해방 이후 본격적인 교육운동에 전념했다. 1945년에 최준은 민립대학을 설립하기 위해 경북종합대학기성회를 발족해 회장이 되었다. 이어 1947년 대구대학교를 설립해 이사장을 맡아 개교했다. 1955년 전재산을 들여 문파교육재단을 설립하고 경주에 계림학숙을 운영했다. 최준 선생은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전 재산을 올인했듯이 교육을 위한 사업에도 모든 재산을 털어 넣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창고에서 나온 문서에서는 교육적인 부분은 월성여학교 설립에 대한 근거, 대구대학교 이사회 초청장, 대구대학교 운영규정, 대구대학교 이사장 명함, 대구대학교 이사장 은행대출금 독촉장 정도에 그치고 있다. 문파 최준은 1970년 86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임재홍 교수는 ‘문파 최준의 민족대학 설립과 교육관’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대구대학교 설립자 최준은 현금 40만 원과 최씨 가문에서 300여년간 가보로 전수되어 온 희귀 고문서 7천200권을 내놓았다”면서 마지막 최부자 최준의 교육에 대한 열의를 소개했다. 전 경주향교 김기조 원장은 “최진립 장군의 후손이신 최준 선생은 망국의 한을 참지 못해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공주감옥에서 옥살이까지 경험한 경주 최부자의 마지막 만석꾼”이라며 “모든 재산을 영남대학교에 희사함으로써 영원한 만석꾼으로 기억될 것”이라 회고했다. 최준의 손자 최염은 “할아버지는 평소부터 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관심이 많으셨다. 할아버지는 대구대학교 설립 이전에 대구에 종합대학이 없다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셨다”면서 “경북종합대학기성회 회장을 맡아 종합대학 설립에 앞장섰다”면서 교육적 열의를 설명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옥영정 연구원은 “문파 최준 선생이 8천968책을 대구대학교에 기증했다”면서 “이는 근검절약과 애민정신을 실천해온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명문집안의 저인적 산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수원대학교 이원영 교수는 “대구대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재정적 지원을 해오던 경주 최씨 가문의 최준이 중심이 되고 향교재단을 비롯한 식자층이 결합해 대학설립 운동을 벌인 결과”라며 “이땅의 사학문제를 근원적으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창호 이사는 “경주최부자민족정신선양회는 경주 최부자가 대대로 지켜온 나라를 위하고, 이웃과 함께 하고자 했던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는 일에 매진할 것”이라며 “창고에서 발견된 문서들을 정확하게 번역해 학술적 문화적 가치를 재조명할 것”이라 말했다. 이어 “최부자 정신이 널리 확산되어 함께 잘사는 윈윈하는 사회가 뿌리내리길 희망한다”고 덧붙였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시리즈)대구의 독립 역사 바로세우기(3)대구3.1운동 독립운동 기념거리 조성사업

3·1 만세운동이 일어난 대구 중구 일원 곳곳이 항일운동의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공간으로 거듭난다.구 동산파출소에서 현 대구백화점까지 대구 독립운동 주요 거점을 중심으로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힘쓴 대구 독립유공자를 선양하고 그 발자취를 재조명하는 기념비와 표지판이 설치된다.18일 대구시는 행정안전부의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사업 공모에 선정돼 지난 1월부터 사업비 1억7천500만 원(국비 1억4천500만 원, 시비 3천만 원)을 들여 오는 11월까지 대구 3·1독립운동 기념 거리 조성 사업을 진행한다고 밝혔다.대구 3·1 만세 운동길은 구 동산파출소(옛 서문시장)~중부서~종로~약전골목~중앙치안센터(옛 대구읍성 남장대 터)~대구백화점(옛 달성군청)을 잇는 거리를 지칭하는 길이다.현재 대구시는 사회단체 및 언론·학계 관계자 등 9명으로 이뤄진 자문위원단과 함께 이달 말 자문위원회를 열고 사업 대상과 우선순위, 조형물 형태, 규모 등을 논의할 예정이다.만세 운동길에 조성되는 독립운동 기념비는 모두 3개소로 석조물과 브론즈 등으로 구성된다.기념비는 현 국채보상운동 기념비와 여성 기념비 석조물 등의 구조를 본 따 세워질 예정으로 그 당시 대구 독립운동의 애국 정신을 느낄 수 있다.구 동산파출소에 ‘대구 3·1 독립운동 발원지 기념비’가 들어서고 근대역사관 네거리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비’, 대구백화점 광장 앞은 ‘대한민국 독립 기념비’ 등이 조성된다.대구 3·1 만세운동길 표지판은 대구 만세운동 최초 시작일인 3월8일을 기념해 모두 8개소에 설치된다. 동판과 석조물 표지석으로 이뤄진 안내판과 함께 태극기가 상시 게양돼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일상에서 되새기는 공간으로 꾸며진다.현재 대구 중구 동산동 15-30번지 서문지구대 인근에 첫 동판 표지판이 설치될 예정이다.대구시는 보현사, 남산교회, 중부서, 종로호텔, 대구백화점 광장 등 38곳의 설치 지점을 두고 나머지 표지판 설치를 완료할 계획이다.대구시 관계자는 “대구 각지에서 활발하게 전개된 3·1운동의 활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공헌한 움직임이 있는 역사적 의의를 고찰해 항일 계승운동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확고히 바로 세우는 게 중요한 과제다”며 “대구 독립운동의 역사를 일반 시민과 청소년이 쉽게 이해하고 대구 독립운동정신이 일상 속에 녹아들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과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이동현 기자 leedh@idaegu.com

경북도, 독립유공자 의료비 400만 원 확대…국립보훈요양원 건립도 추진

내년부터 경북의 독립유공자 의료비 한도가 400만 원으로 확대되고 일본의 수출규제에 맞서 경북 소재 부품 종합기술지원단이 다음주 발족한다. 이철우 경북도지사는 15일 안동 경북독립운동기념관에서 열린 제74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국가공훈록에 오른 독립유공자 1만5천511명 중 경북 출신이 2천232명으로 가장 많다”며 “현재 연간 200만 원 한도의 돌립유공자 의료비를 내년부터 두 배 즉, 400만 원으로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이 도지사는 그러면서 “장기적으로는 국립보훈요양원 건립도 추진하는 한편 후손에게는 도가 추진하는 각종 취업·창업 프로그램 우선 참여 기회를 부여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덧붙였다. 이 도지사는 이어 일본의 수출규제 상황을 깊이있게 언급하면서 “반도체, 디스플레이, 자동차, 전기전자, 기계금속, 기초호학 6개 분야 전문가 100여 명이 참여하는 경북소재부품 종합기술지원단을 다음주에 발족시켜 소재부품산업 기술 개발에 앞장서겠다”고 밝혔다. 이날 경축식에는 이 도지사 외에 장경식 의장, 임종식 교육감 등 도내 기관단체장과 배선두 애국지, 독립유공자 유가족, 보훈단체 등 1천여 명이 참석해 광복의 의미와 순국선열의 거룩한 뜻을 기렸다. 경축식에 앞서 이 도지사 등은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상징조형물 제막식도 가졌다. 도비 2억5천만 원을 투입한 상징물(작품명-염원의 발자취)은 열사가 태극기를 들고 진취적으로 나아가는 모습의 조형물과 100주년의 숫자 100을 형상화한 조형물로 구성됐다. 또 신흥무관학교의 ‘신흥학우보’에 실린 태극기와 독립운동을 위한 비장함과 나라를 반드시 되찾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긴 석주 이상룡 선생의 시 ‘1911년 나라를 떠나며’가 각인됐다. 이철우 경북도지사는 제막식에서 “경북도는 독립운동의 성지로서의 경북의 위상을 재정립하고 현세대에게 선열들의 희생정신과 애국정신을 배울 수 있는 다양한 사업을 마련할 계획”이라며 관심과 참여를 당부했다. 문정화 기자 moonjh@idaegu.com

최부잣집, 삼엄한 일제 감시 속 독립자금 지원 기지 역할 했다

백산무역주식회사는 본사를 부산에 두고 서울, 원산에까지 지부를 둬 경영하면서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거점 역할을 했다. 최부자집 창고의 서류들은 해방 이후 김구 선생의 이야기로 전해지는 “임시정부의 지원금 6할은 백산에서 나왔다”라는 말을 뒷받침하고 있다. 특히 일본의 경북도 경찰책임자가 1919년 10월20일자로 경주 최부자 최준에게 독립운동에 가담해서는 안된다는 자제 경고문을 보내온 문서가 최부자집에서 독립운동을 지원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백산무역주식회사(이하 백산)는 1919년 영남지역의 대지주들이 대거 출자해 당시 조선인의 자본으로 설립한 거대기업이라는 점에서 주목받았다.백산은 최준이 사장을 맡고, 안희제, 윤상은 등이 임원으로 참여했다. 임원 대부분이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있던 인사들로 백산은 처음부터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한 회사로도 볼 수 있다. 백산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초기부터 경비를 조달하는 데 기여하면서 부실이 가속화 했다. 최준은 부친 최현식과 1921년 만석꾼의 재산 대부분을 담보로 조선식산은행으로부터 35만 원을 대출받아 투입했지만 백산은 결국 1928년 130만 원의 부도를 내면서 파산했다. 백산의 현대식 대차대조표와 영업보고서는 깨끗하게 남아 경제학계의 연구자료로도 가치가 높다. 백산의 운영 과정을 밝히는 대차대조표는 현대식으로 작성됐다. 1919년 11월6일 현재 합계잔액시산표를 보면 자산 131만9천 원에 불입자본금 25만 원, 부채 110만3천 원, 당기순손실이 3만4천 원으로 나타난다. 불입자본금 규모에 비해 부채와 손실이 크게 발생한 것은 막대한 독립운동 자금 지원의 결과로 추정된다. 일제가 경주, 영덕, 영일 일대에서 거둔 8천700원의 세금을 우편마차로 경주에서 대구로 수송하던 도중 1915년 12월24일 소태고개에서 탈취당한 사건이 매일신보에 실렸다. 대한평복회 재무부장 최준이 총사령 박상진에게 첩보를 제공해 지휘장 권영만, 우재룡이 거사했다. 자금 관리는 최준이 맡았다. 일제강점기 내내 미제사건으로 남았다.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이 독립운동 거점인 상덕태상회의 자금 회전을 위해 대한광복회 재무부장 최준에게 20편의 대구은행 어음 융통과 5천 원 한도 상향 조정을 부탁하는 편지다. 대구은행 발기인이자 대주주인 최준이 대구은행 지배인 윤정하 등에게 편지를 써서 영향력을 행사해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다.일제 경찰책임자인 경상북도 제3부장이 1919년 10월20일 경주 최부자 최준에게 독립운동 자제를 촉구하는 자제 경고문을 보냈다. 조선이 독립할 수 있다는 것은 불온한 유언비어이자 망상이라며 소요에 가담하는 자는 엄벌에 처한다면서 임시정부 또는 과격단의 요구에 협조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경고하는 내용을 담았다.대한광복회는 친일파를 처단하는 의협투쟁을 벌이는 한편 전국 부호들에게 의연금 모집 통고문을 발송했다. 긴장한 일제가 1918년 1월 충청도 지부원들을 시작으로 대한광복회의 조직원 검거에 나섰다. 재무부장 최준도 체포되어 공주헌병대에서 수사를 받은 뒤 공주 감옥에 수감됐다. 최준의 동생 최윤이 형을 면회한 뒤 1918년 6월13일 공주여관에서 감옥으로 부친 편지다. 옥고를 치르고 있는 형의 건강을 염려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최윤은 가문을 유지하기 위해 형을 대신해 중추원 참의를 역임했다.중국 상하이에서 암약하던 일제 밀정이 일본 외무성에 보고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동향, 3.1운동 초기 상하이 임시정부에 쏟아진 국내외 동포들의 성원을 짐작하게 하는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에 보관되고 있는 보고서. 임시정부의 연간 총지출이 6만2천350원인 당시 최준이 현금 2만 원을 들고 동생 최완을 만나러 상하이에 나타났다. 최완은 임시정부 재무부 위원으로 독립자금 조성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최부자 일가가 독립운동 자금 지원에 상당히 기여했다는 내용을 입증하고 있다. 한편 창고에서 보관되고 있는 4천여 통의 편지글과 엽서, 명함들이 최부자의 인맥을 상상하게 한다. 최부자의 사랑채에는 독립운동가들 뿐 아니라 친일파들의 출입도 잦았다.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가 왕세자 때에 머물기도 했고, 의친왕과 덕혜옹주도 방문했다. 명사들의 사교장이었다. 일제가 노골적으로 탄압할 수 없었다. 경찰을 동원해 일상적인 감시를 펼치면서 항일세력과의 연계를 차단하려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펼치기도 했던 곳이다. 의병장 신돌석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장기간 최부자집 식객으로 은신했다. 대한광복회 우편마차 습격을 모의하고, 탈취한 세금을 은닉한 장소도 최부자집 사랑방이었다. 백산무역주식회사의 산실도 교촌이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일경의 감시를 피해 교촌으로 숨어들었고, 비밀리에 자금을 전달받았던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다. 최부자는 대를 이어 사회적 책무를 중하게 생각했다. 11대 최현식은 경주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했다. 12대 최준은 백산무역주식회사를 맡아 전 재산을 담보로 독립운동자금을 조성하는데 기여했다. 최준의 둘째아우 최완은 임시정부 재무부 위원으로 일했는데 일제에 체포됐다가 석방 직후 순국했다. 셋째 아우 최순은 백산무역의 상무를 맡아 독립자금 조달에 힘썼다. 해방 후 일제 고등계 형사 출신에 암살당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경주국채보상운동 역사 최부자집 창고 서류더미에서 드러나

국채보상운동 참가를 비롯한 경주 독립운동의 모든 역사가 최부자집 창고에서 나온 서류더미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그동안 말로만 떠돌던 경주 최부자집의 일제 민족말살정책 정면 항거가 이번에 쏟아져 나온 항일운동 증명 문서들로 확실한 역사로 재탄생될 전망이다.최부자집에서 나온 문서더미에는 최부자집과 교류했던 인사들의 서신, 명함이 다수 발견 됐다. 특히 국채보상운동과 백산무역주식회사에 관련한 회계장부까지 무더기로 발견돼 역사에 대한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할 수 있게 했다. 일제는 1904년 고문정치에 이어 한국의 경제를 파탄에 빠뜨려 일본에 예속시키려는 목적으로 한국 정부가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게 해 1907년 1천300만 원에 이르는 거액의 외채를 짊어지게 했다. 당시 국민들은 국채를 상환해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국채보상운동을 시작했다. 현재 기록은 1907년 1월29일 서상돈 선생이 대동광문회 특별회에서 국채 1천300만 원을 갚아 국권을 회복하자는 취지를 발의한 것이 국채보상운동의 시초로 알려져 있다. 이 운동이 시작되고 5월까지 4만여명이 참여해 230만 원의 의연금이 모였다. 국채보상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유학중인 800여명의 유학생들까지 동참하게 됐다. 이렇게 운동이 확산되자 일제는 극력 탄압하기 시작했고, 송병준 등이 지휘하던 매국단체 일진회가 공공연히 방해운동을 벌였다. 최부자집 창고 서류더미에는 1907년 정월 김시권, 손규주 등이 경주지역의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하면서 2월5일에 일제히 모이자고 제안하는 광고문이 들어 있었다. 광고문은 국채 1천300만 원의 상환에 사직의 존망이 걸려 있으니 당연히 참여하는 것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특히 1907년 정월22일에 경주 최현식이 단연금 100원을 보내면서 국채보환단연동맹회의 에 참여하지 못한데 양해를 구하는 서신이 나와 경주에서 국채보상운동이 1907년 1월에 이미 시작됐음을 입증하고 있다. 또 경주지역에서 5천명이 넘는 인사들이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했다는 것을 개인별 의연금 기탁금액과 이름을 기록하고 있어 경주지역에서 상당히 활발하게 전개됐음을 알 수 있다. 경주지역은 경주 최씨 11대 최현식이 회장을 맡아 운동을 주도했다. 일제가 조선인 부호들의 재산관리규정을 둬 서울의 이봉래, 진주 김기태, 경주 최준 3인을 지정해 일본인 관리인을 두고, 재산 처분은 관청의 허가를 득해야 한다고 제한했다.이 때문에 최준은 백산무역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여의도 면적의 3/4에 이르는 전재산을 일본의 식산은행에 담보로 근저당설정을 하고 35만 원을 빌려 독립운동자금으로 지원했다. 최부자집의 문서들은 독립운동가 남형우, 박상진, 박열, 김응섭, 김지섭 등을 지원하는 한편 기미육영회 설립, 계림대학 설립, 월성초등학교의 전신인 월성여학교를 설립해 육영사업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백산무역주식회사를 운영한 회계보고서와 대차대조표 등은 당시에도 상당히 진보된 방식으로 회사를 경영했던 것으로 드러나 연구 가치가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최부자집 창고의 문서들은 육영사업, 독립운동 지원에 이어 현대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덕목을 고스란히 증명하고 있다. 진사 시험에 응시한 과거시험지 60여매, 매일 과객을 접대한 서류는 하루 점심 67명, 저녁 250명 등으로 이름은 무시하고 성만 기록한 김생원 등으로 일일이 표기하며 집계한 서류가 남아 있다. 경주최부자 최창호 이사는 “우리 국민들은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하나로 뭉치는 습성을 갖고 있는 것 같다”면서 “일제의 총칼 앞에서도 담배를 끊어 의연금을 모아 나라 부채를 상환했던 정신을 창고의 먼지 속에 묻혀있던 서류더미에서 발견하고 가슴이 뜨거워짐을 느꼈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 우리가 처한 여러 가지 어려움도 국민들은 슬기롭게 헤쳐나갈 것이라 믿는다”고 덧붙였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상해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지낸 석주 이상룡선생 독립운동 일대기 무대에 오른다

상해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인 석주 이상룡 선생의 독립운동 일대기를 그린 창작오페라가 오는 10일과 15일 서울여의도 KBS홀에서 막을 올린다.로얄오페라단이 주최·주관하고 경북도가 후원하는 이번 공연은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기념해 석주 이상룡 선생의 조국독립에 대한 숭고한 삶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대본은 권오단, 각색 이상민, 작곡 이호준, 총감독 이영기가 맡았다. 이상룡 역은 테너 이광순, 김충희, 김유락(이상룡 부인) 역은 소프라노 조옥희, 김옥 등이 맡아 열연을 펼칠 예정이다.로얄오페라단은 그동안 경북의 인물을 모티브로 한 창작오페라‘심산 김창숙(2010년)’을 시작으로 서애 류성룡‘아!징비록(2012년)’, 여성독립 운동가‘김락(2015년)’등의 작품으로 대한민국 오페라대상(창작부문 우수상)을 수상했다. 또 ‘웅도 경북의 인물 무대에 서다’의 일환으로 작품을 기획․제작해 선보였다.석주 이상룡 선생은 1858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1896년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공표에 항거하기 위해 의병에 참여하고 혁신유림적 인사들의 협동학교설립에 합류하면서 1897년경 50세 되는 나이에 계몽주의자로 혁신된 유림의 행보를 걸었다.1911년 해외 독립군운동의 구심체가 되는 독립군기지 개척을 시작으로 군사교육기관 신흥무관학교 설립하는 등 당시 만주지역 독립운동세력의 중추였던 선생은 상해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에 선출됐다.50여 년간 선생의 일관된 구국노력으로 의병, 계몽운동, 독립군 등 독립운동 활동에 힘을 쏟으며 1932년 5월12일 ‘외세 때문에 주저하지 말고 더욱 힘써 목적을 이뤄라’는 유언을 남기고 서거했다.공연은 전석 무료로 진행되며, 오후 3시, 7시 2회에 걸쳐 공연된다.한재성 경북도 문화예술과장은 “이번 공연을 통해 자랑스러운 항일․독립 운동가들을 재조명하고 호국 경북의 위상을 제고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며 “감동적인 스토리로 지역의 대표문화공연으로 거듭 나기를 기대한다”고 많은 관람을 당부했다.김형규 기자 kimmark@idaegu.com

독립운동은 못했어도 광복절 태극기는 꼭 단다

“독립운동은 못했어도 이번 광복절에는 태극기 달기운동에 적극 동참할 계획입니다.” 문경지역에 거주하는 이재우씨는 광복절을 앞두고 이 같은 결의를 다졌다. 충효의 고장인 문경시가 일본의 경제보복에 맞서 시민의 뜻을 담아 전 시민이 참여하는‘나라 사랑 태극기 달기 운동’을 전개한다. 시는 시민의 자발적인 참여로 광복절을 앞두고 9일부터 14일까지 집중 홍보기간으로 지정, 12일부터 8월15일까지 4일간 가정, 건물, 주요 도로변에 태극기 물결을 이룰 수 있도록 시 홈페이지, 전광판,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을 활용해 홍보활동을 벌일 방침이다. 또 공공기관과 사회단체 등에 협조를 요청하는 아파트단지는 안내방송을 해 태극기 달기 운동에 동참하도록 할 계획이다. 시는 주요 도로변에 태극기를 달고 구청이나 읍면동 청사 외벽에 태극기를 설치했다. 문경시 관계자는 “올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의 의미 있는 해”라며 “광복절을 맞아 문경시 전역이 태극기로 물들 수 있도록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부탁한다”고 당부했다.김형규 기자 kimmark@idaegu.com

경북애국지사 발자취 따라 3천200km 대장정 마친 임종식 경북도교육감

임종식 경북도교육감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듯이 올바른 역사를 후세에 전해주는 것이 교육에서 해야 할 일”이라고 밝혔다.임종식 경북도교육감은 27일 경북도교육청 독립운동길 학생순례단과 7일간의 대장정을 마무리 하며 이 같이 밝혔다.그는 올해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경북애국지사들 발자취를 따라 학생들과 동행했다.길이 그리 녹록하지 않은 순례길이었다.32도가 넘는 대륙의 폭염과 길이 끊겨질 정도의 폭우속에서 하루 평균 6시간 차량 이동, 1만 5천보를 걷는 3천200km의 대장정이었다.하지만 그는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조국의 독립을 외쳤던 그들의 발자치를 따라 걸으며 경북교육의 가치를 생각했다.임 교육감은 “신발의 방향은 그 가치를 반영한다”며 “이번 순례길을 통해 우리의 신발의 방향이 어디를 향해야 하는 지 분명히 배웠다”고 밝혔다.그러면서 “애국지사들처럼 길이 없으면 돌아서지 않고 만들며 앞으로 나가겠다”고 강조했다.임종식 경북도교육감은 “강을 건너온 자는 이미 그 이전의 사람이 아니듯이 역사의 강이 우리 자신을 성숙시킨 배움이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며 “순례의 매 순간을 가슴에 담아 경북인성교육의 밑거름으로 삼을 것”이라고 말했다.김형규 기자 kimmark@idaegu.com

대구일보 저널리즘 캠프 참여 학생기자단, 독립운동길 대장정 돌입

대구일보 저널리즘캠프에 참여한 학생기자단(이하 학생기자단)들이 경북 애국지사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6박 7일간의 독립운동길 대장정에 돌입했다. 대구일보 저널리즘캠프에 참여한 학생기자단은 일정 이틀째인 22일 단둥에 도착, 독립운동가들의 망명을 도운 이륭양행터, 단둥 철교 등을 둘러보는 경북독립운동 성지 역사문화 탐방에 나섰다. ‘이륭양행’은 1919년 5월 중국 단둥에 설립된 무역선박회사로 비밀리에 독립운동가들을 상해까지 실어나르는 교통국의 역할을 했던 곳이다. 백범 김구선생도 3·1운동 직후 단둥에 도착, 이륭양행의 도움으로 상해까지 망명할 수 있었다. 이제는 낡은 건물만 초라하게 남아있고, 그나마 작은 현판이 당시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학생기자단은 이륭양행 앞에 모여 안동 독립운동기념관장의 설명을 들으며, 독립운동가들의 애국혼을 기렸다. 또 독립운동가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오가던 단둥철교에 올라 영상으로만 보던 북한의 모습을 멀리서 확인하기도 했다. 앞서 학생기자단은 21일 중국 도착과 동시에 안중근,신채호 선생을 비롯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고초를 받았던 여순감옥과 일본관동법원을 찾아 조국의 독립을 염원한 애국지사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가슴에 새겼다. 경주고 박찬진군은 “교과서를 통해 알았던 애국지사들의 발자취를 통해 우리나라의 뼈아픈 과거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며 “이번 탐방길은 나 자신은 물론 함께 하는 친구들에게는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다질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임종식 교육감은“나라를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헌신하신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통해 나라정신을 되새기고 국가의 소중함을 알아가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학생기자단단은 23일 석주 이상룡 선생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신흥무관학교를 비롯해 의열단결성지, 경북인의 마지막 종착지인 취원창 등 경북애국지사들이 거쳐간 발자취를 27일까지 따라갈 예정이다.김형규 기자 kimmark@idaegu.com